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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17. 2023

남자들의 수다, 기승전 여자

친한 사람들이 카페나 식당에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대화 내용을 우연히 엿듣다 보면 그냥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의 연속임을 눈치챌 수 있다. 옆에서 들으면 아무 의미 없는 대화들의 이어 짐이다. 일명 수다다. 만난 사람들이 어떤 관계로 모였는지가 공동의 대화 소재를 끌고 간다. 종교 이야기, 정치적 논쟁은 거의 들을 수 없다. 사람들이 모이면 불문율처럼 대화의 소재에서 제외되는 부분이다. 너무도 다른 가치관으로 만나는 부분이기에 서로 얼굴 붉힐 필요가 없다는데 무언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대화들의 소재들은 자기의 주변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로 시작하여 "아이들은 학교 잘 다녀? 졸업은 했고?" "큰애 시집은 간다니?" 그러다 문득 서로의 공감대를 공유할 수 있는 소재 하나가 툭 던져지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그쪽으로 와르르 몰려간다. 특히나 질풍노도의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멋 내고 사상적 사유에 빠졌던 대학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그 대화의 소재는 모든 세상소식을 학창 시절로 치환시켜 버린다. 바로 공감이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내용이다. 대화에 거리낌이 없다. 사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했던 과거의 시간들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면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했을 거란 착각을 하고 그럴 거라 믿고 재해석을 해버린다. 각자의 희미한 기억의 고리들을 다시 엮어내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한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네!" "그때 너희들끼리 나이트클럽 가고 했던 거야? 이런 날라리들" 그렇게 기억의 빈 공간들을 다시 채운다.


그렇게 대화는 서로의 공감을 얻고, 공유하고 있던 기억들을 재생해 다시 유대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대화의 주제들은 남자들의 모임에서 하는 것들이 다르고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들리는 것들이 다르다. 아이들 사설유치원 보내느라 밤새 줄 서 있었다는 이야기. 한 달 전에 코로나도 풀리고 해서 참았던 해외여행을 욕구를 푸느라 이탈리아, 스페인을 다녀왔다는 이야기. 서울근교 김포 검단에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대형 카페가 있는데 엄청나더라는 이야기 등등 은근 자랑질이기도 한 것 같고 그렇다고 그 자랑질을 들었다고 크게 질투심도 느껴지지 않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지고 아무 생각 없이 호응하고 반응하는 것. 수다의 기본이다. 수다는 편안함이다. 아무 말 대잔치를 해도 받아주고 맞장구쳐주는 상대가 함께 있다.

남자들도 모이면 수다를 떤다. 여자들만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의 수다 주제는 가끔 정치판을 살짝살짝 넘나들기도 하지만 정치적 대화의 소재는 오래가지 못한다. 정치색이 다른 사람들은 아예 그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대화의 소재로는 젖은 불쏘시개일 뿐이다. "하는 짓들이 그렇지 뭐"정도의 비아냥으로 정치판 대화는 충분하다. 남자들의 대화에서는 연예계 소식도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잘생기고 멋진 남자 연예인은 모든 남성들의 적일 뿐이기에 역시 대화의 소재에서 제외된다. 책받침 여신들의 동향이면 몰라도. ㅠㅠ


보통, 남자들의 수다의 정점은 학창 시절을 지나 군대이야기를 넘어 종착지는 여자 이야기로 간다. 각종 개인적 연애사가 신화처럼 쏟아진다. 기승전여자가 남자들의 수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왜 그럴까? 물론 수다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술의 보조적 기능도 한몫하는듯하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부추기고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좀 더 동물적 본성만 남아있게 만드는 듯하다. 너무 천박한 본능일까?


그렇지는 않다. 대화의 오고 감에 있어 어떤 소재가 그 시간의 소통을 주도하고 있느냐는 공감의 문제다. 남자들의 수다에서 여자 이야기는 바로 영원한 선망의 대상이자 본능을 일깨우는 자극제로 작동하는 듯 하다. 모임에 나온 누군가가 화려했던 과거의 여성편력을 자랑질하면 다른 사람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다음 소재로 등장할 여인의 모습을 상상하고 부추긴다. 과거에 만났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쏟아내거나 판도라 상장을 열고 한 여인씩 꺼낼 수 있는 남자가 그날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간다. 마치 전기수(傳奇叟)처럼 그날의 히어로가 된다. 나이가 든 남성들의 모임일수록 여성편력이 많은 사람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듯하다. 많은 여성을 만나는 남자가 남자로서의 기능도 왕성할 거란 상관관계로 이어지고 자기는 감히 해보지 못한 것을 해내고 있는 남자를 통한 대리만족으로도 연결되는 듯하다.


이런 소재들은 당연히 아무 의미를 담을 수 도 없고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애매하다. 그것이 수다의 근본이다. 아무 의미 없는 소소한 대화다. 의미가 없지만 서로 공감하는 내용으로 작동하는 소재로써의 기능이 중요하다. 남자들의 수다의 정점을 찍는 기승전여자의 결말도 아무 의미 없지만 남자들의 공통된 관심이자 공감을 불러오는 소재임에 분명하다. 나이를 불문하고 대부분 남자들의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로 등장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야기가 끝나고 헤어져 집에 가는 길에 뒤돌아 생각해 보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시간 죽이기의 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방언이라도 터지듯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맞장구 쳐주고 웃고 떠드느라 스트레스가 사라졌음을 눈치채게 된다.


그렇게 수다는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고 쏟아내는 탈출구다.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을 쏟아내면서 그 사이사이에 감추었던 그 어떤 것, 버리지 못했던 그 무엇을 함께 내보냄으로써 머릿속을 비우는 행위가 수다다. 수다는 공감하는 소재를 많이 같이 공유한 사람들이 만나야 제 기능을 발휘한다. 주변에 이렇게 함께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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