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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18. 2023

사람냄새를 빼라

장마전선이 거의 20일 가까이 한반도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 많은 비가 내려 일상을 힘들게 한다. 심지어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참담한 현장을 남기기도 한다. 지구표층사의 현장은 이렇게 살아가고 살아내고 버티는 생존의 싸움터다. 겉으로는 평온한 척 미소를 띠고 있지만 머릿속은 계속 어떻게 하면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지 끝없이 두리번거린다.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지 않을 뿐 속은 조마조마한 외줄 타기 심정으로 살고 있는 게 인간 본성이다.


이 위험을 감지하는 인간 본성에 불을 지피는 단어들이 있다. 책임회피, 책임공방, 인재(人災), 네 탓 등의 단어가 언론에 난무한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반드시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사건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찾게 되는 원인의 발단과 책임을 묻는 일이다. '왜'에 집중하는 물음 때문이다. 왜 그 사건이 벌어졌는지, 왜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지에 대한 감정을 자극하는 용어들이다.


벌어진 사건을 볼 때는 인간적 감정을 빼야 제대로 된 사실을 만날 수 있다. 감정이 우선하면 사건의 팩트보다는 인간적 현상에 집중하게 된다. 사건의 당사자를 찾고 희생양을 만들고 책임을 물어 사건을 일단락하려고 한다. 이 과정 중에 지난한 공방이 벌어지고 시간이 흘러간다. 사건의 본질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사람과 진영 간의 진흙탕 싸움만 남는다. 그러다 흐지부지 잊히고 그 어느 날 비슷한 사건이 또 벌어진다. 또다시 장작불 태우듯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사건은 감정의 사이클을 따라 돌고 돌며 무한반복된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원인을 찾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사건 사고는 천재지변을 비롯하여 인간군집 사회에서 언제나 벌어지고 일어난다. 아니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의 확률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것이 원인규명의 이유다. 설사 그런 사건 사고가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지, 시스템적으로 제도와 체계를 보완해 나갈 수 있는지에 힘을 모아야 한다.


제도가 미비했으면 제도를 보완해 나가고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면 분명하게 경계를 정해 관리를 하도록 해야 하며 그동안 정부 부처 간의 연계가 안되었다면 잘 되도록 소통 채널을 확보해 나가는 일을 해야 한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지만 명문화만 시켜놔서는 안된다. 실제로 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하고 대처요령을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하지 않았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의 반복을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알면서도 안 되는 것이 실천이고 공유다. 알아서 하면 나만 고생하는 것 같고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다. 적당히 시간 때우다 가는 것을 요령 있다고 하고 나서서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런 기회주의와 회피의 싹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도와 법이다. 법과 제도를 만들어도 법꾸라지들이 또 등장하겠지만 그래도 좀 더 안전한 사회로 한 발짝 나아간 것은 분명할 터다.

그래서 세상일은 항상 리뷰와 평가가 필요하다. 리뷰와 평가는 되돌아 복기를 해보는 일이다. 사건의 발단부터 종료까지 찬찬히 살펴보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지켜지지 않았거나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보완할 일이다. 그래서 향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처해 피해와 희생을 최소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무한대의 확률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건 사고가 없을 수 없다. 천재지변은 말 그대로 예측이 불가능하고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예측을 하고 예보를 하고 주변을 살펴 피해가 추가되지 않도록 하는 일 또한 사회 시스템이 할 일이고 악마적 인간 본성을 제어하는 일이다.


호모사피엔스는 20만 년 전 종 분화를 거치면서 현재까지도 제도와 문화, 도덕 등 선한 사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DNA를 유전자에 심지 못했다. 20만 년 전에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나 지금 태어난 갓난아이나 똑같이 무방비 상태의 위험에 노출되어 세상에 나온다.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막대한 사회 체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모두 태어난 이후 학습으로 인하여 갖고 있는 것이다. 유전되어 전승되지 않는다. 가르치고 배우고 익혀야 가능하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책이나 기타 수단 등이 없어진다면 20만 년 전이나 지금의 인간이나 똑같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존기계일 따름이다.


하지만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 지금 현생인류는 DNA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학습이라는 과정을 통해 전승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본능적으로 회피하지 못하더라도 인위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을 감지하고 처리하고 대처하는 시스템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는지가 사회의 성숙도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아직도 희생양을 찾고 책임을 회피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미 벌어진 사건은 반면교사가 되어야 한다.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타까움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망연자실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어깨를 안아주는 일 또한 우리 사회가 할 일이다.


안타까움이 감정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냄새를 빼고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사건의 본질을 만나고 개선하고 보완하여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어떤 표현으로도, 위로로도 대신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나마 서로의 어깨를 보듬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 공동체에 이타심(利他心)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조금 더 안전하고 조금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공간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나만 살아남는 것보다 함께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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