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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l 25. 2023

교회오빠의 진실

선(善)한 사람의 대명사로 '교회오빠'를 꼽는다. '교회 누나'도 있다. 그런데 '성당오빠'나 '사찰오빠'라고는 잘하지 않는다. 입에 익지 않아서 그런가?


단어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결정되면, 다른 단어가 그 의미를 공유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무엇이 되었든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  


이젠 감히 '성당오빠' 정도로는 '교회오빠'를 당할 재간이 없다. 외모가 출중하고 악기를 잘 다루고 심성과 매너가 좋다고 해도 소용없다. '교회오빠'가 '갑'이다. 왜 그럴까?


(disclaimer ; 교회누나도 있지만 일단 빼도록 한다. 편견 같은 것 없다. 글에 면죄부 단서를 다는 이유는 가끔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어서다. 그냥 사견의 넋두리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읽어주시면 된다. 논문이 아니다. 맞다 틀리다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인들을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 또한 전혀 없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글은 안 쓰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글 쓰다 보면 그게 잘 안된다. 써보면 안다. 아무튼 ---)


참 '교회오빠'의 인기는 아직도 하늘을 찌르는가? 시대와 세대를 따라 사람의 감정도 같이 변해가는 터라 요즘 '교회오빠'의 인기는 예전 같지는 않은 듯하다. 오빠라고 부를 정도의 세대들을 꼰대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꼰대의 시선으로 추억팔이하듯 '교회오빠'를 불러와보자.


60대를 바라보는 586세대에게 교회는 젊은 청춘들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 교회뿐만이 아니었다. 절도 그랬고 성당에서도 그랬다. 중고등부, 청년부 모임들이 종교단체마다 성행을 했고 신앙인 모집에 열을 올렸다. 젊은 청춘들은 사실 신앙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이성 상대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 더 발길을 붙잡힌 듯하다. (오해 없기 바란다. 나만 그랬을 수 도 있고 일부만 그랬을 수 도 있다. 문장 문장마다 disclaimer를 걸어야 하나 ㅠㅠ 이런 제길 --- 괜한 불안감이 ㅠㅠ) 


아무튼 그렇게 방학 때면 여름 수련회도 따라다니고 성가대에서 노래 찬양도 하는 와중에 이성 친구, 후배, 선배들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면 종교적 심신이 깊은 사람과 날라리로 교회에 오는 사람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교회 활동을 하는 행동거지에서부터 드러난다. 딱 보면 안다. 신앙의 깊이를.

그중에 '교회오빠'가 고춧가루처럼 등장한다. 예배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교회에도 착실히 잘 나오고 여러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주일 학교 선생님도 맡아 어린이 성경 읽기도 도와준다. 가스펠 성가곡을 잘 부르는 것을 넘어 기타나 피아노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청년부를 대표하는 완장 하나쯤은 차고 있다. 그래야 '교회오빠'가 될 수 있다. 기타 줄 좀 만졌다는 586 세대의 대부분은 아마 '교회오빠'였을 가능성이 크다. 


'교회오빠'는 착함의 대명사다. 다정다감하고 모든 고민을 다 들어줄 것 같고 해결책도 다 말해줄 것 같다. 테리우스를 선망하는 여학생들에게 '교회오빠'는 백마 탄 기사로 보인다. 못하는 게 없는 선한 이미지의 '교회오빠'로 믿게 되고 의지하게 된다.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해, 거기다 훤칠한 외모에 잘 생기기라도 하면 금상첨화다. 그다음부터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오빠'만나러 교회를 간다.


그런데 '교회오빠'는 과연 진정 착하고 선한 사람일까? '착해 보이고 싶어 하는 남자'의 대명사가 '교회오빠' 아닐까? 질풍노도의 시절 '교회오빠' 신드롬에 빠져 있었던 세대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오빠'가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교회오빠'는 착해 보이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로망이다. 착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착해 보이려고 가식의 노력을 하는 남자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 선을 꾸미다 보면 선해지기 마련이다. 착하게 보이려고 애쓰다 보면 착해지는 것이다. 위선(僞善)을 선이라 할 수는 없다. 겉으로 착한 체를 하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선일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완벽한 위선은 선이 된다. 구분할 수 없다. 착한 척하다가 진짜 착해지는 것이다. 선의 평범성이다.


'선의 평범성'은 물듦이다. 옆으로 옆으로 전파된다. 파동이 되어 심금을 울린다. '교회오빠'는 그렇게 소녀시대의 로망에서 선의 확장이라는 파급력을 장착하고 있다. 그저 난봉꾼인데 살짝 선의 가면으로 위장을 했다고 해도 그렇게 못된 놈은 드물다. 단어가 주는 의미의 장에 갇히면 나쁘게 행동하려고 해도 행동에 제약으로 다가온다. 자기를 규정하는 강력한 힘이 작동되어 생각과 행동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멋진 '교회오빠'로 다시 거듭나기 위해서는, 예전에 날고 기지 않은 남자 어디 있겠냐만은 그래도 청춘의 로망이 묻어 있는 '교회오빠'였다면 다시 한번 기타를 둘러매고 새치가 뒤섞인 머릿결을 바람에 날려보는 호기도 부려볼 만하다. 호호 깔깔 웃어대던 여학생들의 틈바구니가 아니더라도 그 세대가 파마머리 장착한 중년이 되었을 테니 심장 한구석에 남아있을 '교회오빠'로 다시 부활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잊고 있었다면 다시 청춘의 위선을 드러내볼 일이다. 가당키나 한 일일까? 일단 해보자. 기타 줄 도 다시 조율하고 목소리도 다시 가다듬어 보고 똥배 나왔다면 집어넣어 보자.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 해봐야 안 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다음에 포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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