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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ug 23. 2023

보이는 게 다 가 아니다

인간은 직관의 존재다. 오감을 통해, 봐야 믿고 만져야 믿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들어야 믿는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사기라고 생각한다.


이 호모사피엔스의 직관(intuition)은 르네상스를 거치고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고 멀리 보는 도구가 과학의 세계를 열기까지 인류의 가치와 사고체계를 점령했다. 아직도 그 망령은 위력을 발휘해 종교로, 관습으로, 주술로 남아 존재를 과시하기도 한다.


기원전 400년경,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모든 물질이 불(fire), 공기(air), 물(water), 흙(earth)이라는 4가지 본질적 원소들의 합성물이고 사물은 이 기본 원소의 비율에 따라 서로 형태를 바꿀 뿐 어떤 사물도 새로 탄생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이 4원 소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계승되어 2,000년 넘게 인간의 사고체계를 지배해 왔다.


직관적인 사고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생각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데 반론을 제기하기가 애매하다.


그런데 이 직관이라는 것이 브레인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사기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실제 자연을 절대 볼 수 없는 존재다. 봐야 믿을 수 있다는 시각의 세계만 해도 수없이 많은 착시들을 경험할 수 있다. 본다는 행위는 눈의 망막을 통해 외부의 빛을 감지하여 시신경 회로를 통해 뇌로 전달하고 이 빛의 정보를 브레인이 해석해서 내놓는 것을 말한다. 눈은 빛을 감지하고 모으는 역할을 할 뿐 브레인의 해석이 있어야 본다는 행위가 성립한다. 이 과정에서 왜곡이 발생한다. 브레인은 들어오는 정보가 불완전하더라도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채워 넣는다. 태양빛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비추기 때문에 명암이 아래로 생긴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안다고 인식한다.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멀리 있으면 작게 보인다는 너무도 단순한 현상을 이용해 착시 사진을 찍는 것도 너무도 일반적인 사진촬영기법이다. 거리감을 비교할 수 있는 배경이 전혀 없는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각종 프로필 사진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믿는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단어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놓고 그렇게 될 것임을 스스로 확신하는 수준의 용어다. 믿는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여기는 것'일뿐이다.


과학은 이 막연함에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는 일이다. 그래서 꼼짝 못 하게, 믿는 것의 이면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한쪽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습도 가능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모습이 존재한다는 직관을 깨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Elemental)은 불과 물과 공기, 흙의 4 원소가 살고 있는 엘리멘트 시티에서 불과 물의 사랑을 유쾌하고 재치 있게 풀어간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 같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과학적 현상도 숨어 있다. 바로 물과 불이 공존할 수 있는 라이덴프로스트 효과(Leidenfrost Effect)다. 액체는 끓는점보다 높은 온도의 물체에 접촉을 할 경우 빠르게 액체가 끓으면서 증기로 이루어진 절연층이 생성되는 효과를 말한다. 이 효과로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물방울이 굴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상생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과 물도 같이 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다. 물과 불도 이럴지언대 인간이 융합 못할 일은 없다. 인간은 다만 하지 않을 뿐이고 하기 싫을 뿐이다. 바로 감정이라는 묘한 변수가 작동해서 그렇다. 


감정은 직관을 넘어가는 현상을 극도로 꺼린다. 보여주어야 알고 만지게 해야 믿는다. 그래야 감정이 더 실리고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관의 벽과 감정의 벽은 거의 공통의 2중 방탄벽이다. 직관의 이면의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뛰어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힘든 과정이 수반된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묻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차이를 알고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직관을 해석하는 브레인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비교 재료를 넣어줘야 한다. 생각하는 시민을 전제로 민주주의의 존재가 규정되듯이, 인간을 규정하는 생각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을 살펴야 한다. 외골수로 단편의 지식과 편향된 사람만을 만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도 만나야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보이는 게 다 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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