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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11. 2023

그대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름(名, name)은 대상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존재로서 생명을 부여받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이름을 부여하면 그 사람의 존재가 규정되며,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면 고유명사가 된다. 인간의 언어가 자연에 투영된 절묘한 실체 인식의 수단이다.


이름 붙여지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실체든 추상이든 이름 붙여져야 그때서야 존재로써 다가오고 다른 사물과 사람과 연관성을 갖고 의미의 바다에 떠오른다.


김춘수의 시 '꽃'을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어디 이뿐이랴, 윤동주의 '별 헤는 밤'도 보자.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는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쓸쓸함과

   별 하나의 동경과

   별 하나의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의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이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름이 '다'다.

시상과 감상 속의 이름을 떠나 내 이름을 보자.


각자의 이름은 가족이 태어난 자녀에게 부여하는 세상의 총합이다. 자녀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 담겨있다. 함부로 이름 짓지 않는 이유다. 작명소를 찾아가고 몇 날 며칠을 숙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네이밍이 아닐 수 없다. 돌림자의 족쇄에 묶여 부를 때 폭망한 이름이 있기도 하지만 한자의 심오한 뜻으로 들어가면 조상들의 한 차원 높은 이상이 숨어있다. 어느 가문이 돌림자를 아무 생각 없이 만들겠는가. 다만 세월이 지나고 가치가 바뀜에 따라 돌림자가 주는 의미도 변하고 청음의 효과도 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협화음일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가문의 돌림자를 쓰는 집안도 거의 없는 듯하다. 


시대에 맞춰, 아니 작명소가 많이 쓰는 한자어에 따라 그때그때 유행하는 이름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40-50대 남자들의 경우 '윤(潤, 允)'자나 '환(煥, 歡)'자가 이름에 들어간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시대상이 이름에 들어오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근래에는 '준(俊, 晙)'자나 '우(優, 釪)'자가 들어간 이름들이 인기인 듯하다. 유명 연예인들의 이름 중에 '서준' '민준' '하준' '준우' '시우' '선우'등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근래 이름에는 한자의 뜻이 담고 있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부르게 편하고 예쁘게 보이는 쪽으로 더 많이 이동한 듯하다.


그만큼 '이름'이 갖고 있는 정체성은 그 사람의 대표 이미지가 된다. 이름 붙여진 대상은 이미 시간의 변화 속에서 예전의 그 모습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름 붙여진 그  이름으로 평생을 대상 지워져 산다. 어제의 내가 아니고  10년 전 내가 아니고 30년 전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했다. 자기 이름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이 담긴 이름대로 세상이 펼쳐놓고 있는 나의 존재의 가치가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지 말이다. 시인 윤동주가 별을 헤던 밤의 낭만 중에 맞닥트린 어머님 이름으로 인하여 수많은 이름을 연상하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이름들이 초저녁별 떠오르듯 생생히 그 기운을 차리도록 회상에 채찍질을 해야 할 터이다.


사그라들지 않도록, 새벽녘 잔불이 아침이슬에 꺼지지 않도록, 되뇔 이름을 불러내야 한다. 어렴풋이 끄집어낼 수 라도 있다면, 되씹고 되새김질하여 진액이 이빨 사이사이 낄 때까지 이름을 찾아야 한다. 각인되어 끄집어내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없는 것이다. 이름이란 그런 것이다. 불려짐을 필연으로 한다. 


그래서 지금 그대 이름을 불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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