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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12. 2023

질문은 지식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는 창문이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이 질문을 받으면 갑자기 머리가 깜깜해지거나 하얘진다.


왜 그럴까?


내가 주체적으로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을 가질 만큼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생각하는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러기에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무엇을 아는지 조차도 어렴풋할 뿐이다.


이 사소한듯한 질문이 일상생활에 관한 것이라면 그나마 중구난방으로 답변할 수 있다. 그 답변의 수준이라는 것이 천박할지라도 말이다. 보통 일상에서 받게 되는 질문들은 크게 고민하거나 생각과 말을 정렬할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주로 감각적 표현을 요하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어제저녁 족발집에 갔다며 맛은 어땠어?" "여행 다녀왔다며 어땠어? 경치 죽여줘?" "코로나 걸렸었다며 지금 컨디션은 괜찮아?" 등등이다. 히지만 이런 질문은 질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대화를 질문형 대화로 하고 있을 뿐이다.


질문(質問, question)이라 함은 근본을 묻는 것이다. "모르거나 의심 나는 점을 물어 대답을 구하는 것"이다. 질문에는 깊이가 있어야 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질문에 따라 답변이 달라진다. 접근 방법이 다른 것이다. 감각적 일상 질문에 대한 답변은 뻔하다. "맛있다. 멋있다. 괜찮다"정도의 단답형이면 족하다. 질문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이끌어내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일상적 질문이라도 방향과 깊이를 달리해보면 답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족발집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먹거리에 대한 질문일 테니 그저 그런 질문이 주류이겠지만 맛의 재료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 질문을 던져보자. "족발을 삶을 때 어떤 양념과 향신료를 넣은 것 같아?" "양념, 향신료? 모르겠는데 ㅠㅠ"


질문에 들어간 단어 하나 때문에 족발 맛의 성질이 확 바뀐다.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지식만큼 위계(hierarchy)가 확실한 것이 없다. 족발은 어떤 혼합 양념에 재웠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족발집마다 청기와장수 같은 노하우가 숨어있다. 삶고 양념한 족발을 구웠는지, 구울 때 스모크향을 입혔는지에 따라 복잡하고 미묘한 맛의 차이를 우려낸다. 그저 '맛있는데'라는 표현 가지고는 그 맛의 깊이를 끄집어낼 수 없다. 


"맛있게 먹으면 됐지. 뭐 감나라 대추나라 꼬질꼬질 따지고 물어. 정신 사납게. 따지고 들면 없던 맛도 생기고 달라지냐?"라고 윽박지를 수 도 있다. 하지만 질문이란 그런 것이다. 사소함에 숨어있는 깊이를 들여다보는 창문이다.

질문은 사유의 깊이를 깊게 하고 생각의 넓이를 확장하며 사고의 방향을 360도로 향하게 한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질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묻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는다. 묻고자 하면 알아야 한다. 알아야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모르면 물을 수 조차 없다. 너무도 명확하고 자명하다.


생각과 사유에는 분명히 위계가 존재한다. 그 위계의 꼭대기는 끝이 없다. 하지만 수준의 지평은 구획 지어져 있다. 대화를 해보면 안다. 얼마나 아는지, 겉만 아는지, 아예 모르는지, 아는 척하는지 말이다. 그것을 지식의 수준이라 한다.


질문의 수준이 곧 지식의 수준이다. 아는 것을 물을 수밖에 없다.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를 묻는 것이고 비교가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다. 타인의 의견이 있어야 내 의견도 존재 의미를 갖는다. 획일적 사고를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질문이 나오기 힘들다.


질문은 한 방향으로만 뛰는 일방성에서 각자의 방향대로 뛰어도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깃발이다. 한 방향으로 뛰어 순위가 정해지는 틀이 아니라, 각자의 방향으로 뛰어 모두가 1등이 되게 하는 마법이다.


깊이와 넓이와 방향을 키를 쥐고 있는 질문의 중요성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나에게 물을 것인가? 점심에 뭐 먹지? 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질까? 아니면 제임스 웹이 보내오는 우주의 심도를 보고 표준모형 모델 이론에 의문을 품는 과학자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물어볼까?


질문이 행동을 만든다. 생각의 움직임이 있어야 몸도 움직인다. 그것이 산다는 것을 증명이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고 그 답을 자기 의견으로 내놓는 일이다. 질문하기 위해 공부하고 타인의 시선과 사견도 청취해야 한다. 다름을 알아야 비교할 수 있고 비교할 수 있어야 질문이 가능하다. 결국 질문을 한다는 것은 타인과 다른 나를 찾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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