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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13. 2023

힘듦보다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인간의 뇌는 고통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예측할 수 있는 고통은 참아낼 수 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은 참기 힘들다. 병에 걸려 수술을 한다고 할 때 수술을 하는 이유는 수술 후에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을 한 후 건강하게 사는 주변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견된 고통을 참아내는 원동력이다. 살을 째고 장기의 일부를 떼어내는 고통의 크기를, 수술 후에 누릴 수 있는 건강에 대한 희망의 크기가 억제하는 것이다.


인간이 불확실성을 혐오(嫌惡, hate)에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는 데에는 진화론적 아포페니아(apophenia) 현상이 발전한 듯하다. 생존의 선택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포페니아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대상 사이에서 의미 있는 연결을 인식하는 심리적 경향"을 말한다. 변상증(變像症)이라고 하는 파레이돌리아(pareidolia)가 전형적 아포페니아 현상의 일종으로, 형태가 없거나 모호한 시각적 자극에서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패턴을 끄집어내려는 심리적 착시현상이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나 연기를 보고 토끼와 개, 고양이와 같은 동물의 형상을 찾아내는 등 자기가 알고 있는 익숙한 모양을  찾아내는 행위다. 가장 흔하게 사람의 얼굴을 찾아내고 예수의 형상이네 부처의 모습이네 가져다 붙이고 산꼭대기 바위를 보고 거북바위네 촛대바위네 장군바위네 이름 붙인다.


길을 가다가도 앞에 걸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무의식 중에 보면서도 우리의 뇌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오버랩시키고 검색을 한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판별해 내고 심지어는 "누구랑 많이 닮았네"라고 까지 닮은 점을 찾아낸다.


인간의 뇌는 패턴 찾기의 천재다. 평면에서 점이나 선 3개만 있어도 사람의 얼굴을 인식할 정도라고 한다. 이 패턴 찾기의 응용이 자율주행차가 사물의 움직임을 감지해 내는 기술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이 이 파레이돌리아와 아포페니아를 발달시켜 온 데에는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에 산길을 가다 발 앞에 놓인 긴 나뭇가지를 보고 뱀으로 착각해 화들짝 피하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 뱀이 아닐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그냥 걸어갔는데 그것이 실제로 뱀이었다면 당장 황천길을 갔을 것이다. 이렇게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하고 피해서 살아남은 선조들의 후손이 바로 우리들이다.


하늘에 떠있는 별들에 이름을 붙인 별자리도 마찬가지다. 이 가을에 볼 수 있는 페가수스자리, 고래자리, 염소자리라고 하는 별무리들을 아무리 쳐다봐도 고래와 염소는 없다.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한다. 그럼에도 그렇다고 하고 봐야 더 잘 보이고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 불확실성을 패턴을 통해 확실로 전환하는 기막힌 방법이다.

불확실은 불안과 동의어다.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지속적 패턴을 보여 향후에도 계속 그렇게 될 거라고 알면 불안해지지 않는다. 계속 그럴 것이기에 거기에 맞게 대처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파트 층간 소음만 해도 그렇다. 일정한 시간 일정한 패턴으로 발생하는 소음은 무시하게 된다. 매일 아침마다 들리는 헤어드라이어 소리는 윗집 아줌마 출근시간을 알리는 자명종과 같고 주말 오전에 들리는 진공청소기 소리는 당연히 들을 수 있는 소음이라는 인식에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잠시 들리다 그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는 예측할 수 없다. 아이들은 뛰고 싶을 때 뛰기 때문이다. 언제 뛸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불안을 키우고 들릴 때마다 불안은 짜증을 수반하고 화를 나게 한다.


불확실성을 잠재우는 방법은 오히려 간단하다. 재빨리 놓인 상황을 펼쳐놓고 분석해 보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어디로 나아갈지,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따져보는 것이다. 이 상황판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지레짐작하여 결론을 내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고 더 불확실한 세계로 빠져들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결국 불확실의 확률을 최소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내가 수긍할 수 있을 정도, 스트레스받지 않고 견딜 수 있을 정도까지 불확실성을 줄여나가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불확실성의 확률을 줄이는 방법은 묻지 않아도 다 안다. 충분한 대조군이 있어야 한다. 많은 상황과 접해봐서 '그럴 때는 이렇게 되더라 그러니 저렇게 응수를 하는 것이 더 좋다'라는 경험치가 필요하다. 무엇이 됐든 경험 많은 놈을 당할 수 없는 이유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알아, 많이 체험해 보는 것이 불확실성을 확실로 만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도전을 멈추지 말아야 하고 시작을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컴퓨터 게임에서의 경험치가 노련함의 증표이듯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불확실의 확률을 최소화할 수 있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일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그동안 축척해 놓은 경험치를 융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지 않고 해내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불확실은 내가 하지 않았기에 숨어있는 검은 장막과 같은 것이다. 내가 걷어내고 내가 치워야 한다. 그 과정을 즐겨야 한다, 불확실성을 즐겨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는 도전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 게 인간의 간사함이다. 불확실성을 확신으로 만들어갈 때의 희열을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도파민이다. 과감히 불확실성의 세계로 나서서 즐겨보자. 그것을 산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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