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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Sep 20. 2023

사건을 보는 시각 차이

사회현상을 해석하는 것만큼 조심스러운 것이 없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정답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가장 그럴듯하게 해석하여 호응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게 인문이고 관계이고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다. 인문 사회에서는 다양성이 생명이다. 이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논의 자체가 안된다. 말싸움밖에 할 수 없다. 말싸움하다 감정이 복받치면 욕이 나가고 조금 더 가면 주먹도 나가고 그러다 판 깨지고 서로 원수가 된다. 인본이 죽은 저질 사회의 표상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듯하여 불안이 앞선다.


우리 한국 사회가 지금 같은 태평성대와 경제성장을 누리고 사는 것은 획일화된 통일성이 강력한 기둥이 되어 온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휴전상태인 한반도의 긴장 속에서 그나마 붙잡고 버티고 있는 버팀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젠 그 성격을 바꿀 때가 되었음도 모두 인식하고 있다. 더 이상 밀어붙이기식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바꾸기 쉽지 않은 이유도 다 안다. 바꾸지 않으면 정체됨을 넘어 후퇴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잘 안된다.


왜 그럴까? 성장과정에 자리를 차지하고 기득권의 권력맛을 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내려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면 기득권도 바뀔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한번 쥔 권력은 스스로 내려놓는 경우보다 끌려내려오는 경우가 더 많다.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이 악귀처럼 작동하고 있는 것이 사회다. 그 악귀의 힘을 얼마나 적절히 제어하고 통제하여 무제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느냐가 선진 사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된다.


인간이 모여사는 사회에 문제가 없을 수 없다. 함께 살기 위한 온갖 제도와 법과 규범과 관습이 버무려져서 굴러가는 것이 사회다. 한국사회는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용광로에 쓸어 담았다. 다행히 용광로를 통해 만들어진 주물이 제대로 형상을 갖추고 있다. 이제는 그 주물을 제대로 광내고 세공하는 노력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회가 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분야가 바뀌고 어느 제도 하나, 어느 교육 시스템 한 곳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전 분야에서 모든 개선책을 찾고 그 방안을 한 곳에 쏟아놓고 하나하나 골라내야 한다. 통합할 것은 모으고 나눠서 더 좋을 것은 세분하는 분류작업을 거쳐야 한다.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대학입시 관련 문제만 해도 그렇다. 대학줄세우기기 존재하는 사회에서 초중등 때부터 줄 서는 연습을 시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교육현장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현상이 빚은 기이한 모습임을 함께 읽어내야 한다.  기성세대는 그렇게 교육받고 그 환경에서 커 왔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대학수능시험 결과 발표가 있을 때면 학원도 다니지 않고 독학하듯 공부해서 만점 받은 학생들이 언론에 소개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지만 그런 천재는 수만 명의 학생 중에 유일한 경우다. 그런 천재는 학습과정과 시간을 뛰어넘는 특이한 사례라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 제도의 뒷모습을 감추는 장막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렇게 만점 받아 입학한 학생들을 추적하여 어떻게 학업을 했는지 지금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사는 본 적이 없다. (안 찾아봐서 그런가 ㅠㅠ)


그런 일부 천재들을 제외하고 보통 학생들에게 선행 학습은 필수였고 그 선행학습은 곧 돈이다. 한 집의 경제력이 곧 학력으로 드러나고 학벌로 표출되어 우리 사회의 권력 1호가 되는 검사가 되고 경제 1호가 되는 의사가 된다. 돈과 권력만을 쫒는 천박한 세대를 만들어 놓았다. 기성세대들이 말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지만 선출 권력보다 더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오래갈 수 있는 카르텔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 와중에 계층 간 투쟁을 유발한다. 누군가 밟고 넘어가야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에 자기들끼리 싸우게 된다. 인간 본성에 숨어있는 계층의 분화와 줄 세우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관계를 명확히 확인하고 공부하지 않아서 시간의 순서를 뒤섞어 말하면서도 마치 그 말이 맞는 것처럼 우긴다. 웬만하면 다 안다. "저 무식한 놈".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왜곡된 것을 진실인양 내뱉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측은지심이 들 정도다.


사회 주류의 물꼬를 이렇게 끌고 가서는 안된다. 물꼬는 물 흐르는 데로 가게 놔둬야 한다. 일방적으로 전후좌우 보지 않고 몰고 가는 것은 소몰이나 양몰이할 때나 쓰는 방법이다.


사회적 아픔을 감싸안는 방법과 그 사안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사후에 어떻게 재발방지를 위해 고민하는가를 보면 그 사회 구성원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2007년 미국 버지니아공대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범인을 포함 33명이 사망했는데 학교에 사망자의 이름이 적힌 추모비를 33개를 설치했었다고 한다.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추모비도 있었던 것이다. (추모비 설치 후에 이에 대한 반발로 없어졌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을까? 감히 살인자의 추모비를.


사건을 보는 미국사회 시선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사건의 개인의 범죄로 인식하기보다는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이민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고민을 함께 꺼내 드러내는 것이다. 무고한 희생도 추모하지만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를 보는 각자에게 묻는 방법이다.


과거의 잘못했던 행위를 지우기보다는 그대로 남겨 후대에 반면교사로 보이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재발방지를 위한 더 탁월한 선택임이 분명하다. 잘못을 지워버리고 감춰버리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가렸을 뿐이다. 스멀스멀 악취가 나듯 언젠가 다시 등장한다. 감추기 않고 드러내 보여주면 더 이상 악취가 아니고 혐오물이 아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명판이 된다.


한국사회는 어떤가? 비슷한 대형 사건사고가 반복되어 일어난다.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반면교사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때뿐이다. 반짝 분노하고 반짝 관련자 처벌하고 끝.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도 사건 뒤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히고 사건은 또 반복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존엄(dignity)과 품위가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는 각성이 있어야 하고 지속적인 공부가 병행되어야 한다. 공부하지 않아 왜곡된 줄도 모르고 내뱉는 어리석음만큼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모르면 공부해서 다시 의견을 말하겠다고 하고 잘못 알고 있었다면 잘못 알고 있었다고 사과해야 한다. 아무리 정답이 없는 인문이라고 하지만 꼴리는 대로 말하는 것을 자기주장이 강하다고 하고 꼴리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추진력 있다고 아무리 미화해 봐야 저질사회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사회를 양극단으로 몰고 가는 모리배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과반수의 미학'을 활용한다. 진정한 권력은 과반수 뒤에 있는 세력을 보듬어 안을 수 있을 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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