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Sep 27. 2023

동네싸움의 끝판왕, "너 몇 살이야?"

어떤 사안에 대해 벌어지는 논쟁을 지켜보다 보면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본질은 없어지고 아무 상관없는 곁다리를 가지고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싸움 중에 꼭 등장하는 "너 몇 살이야?"가 대표적으로 곁다리로 빠지는 대사 중 하나다. 이 문장은 동네싸움에서 말의 논리가 밀리고 있음을 직감한 연장자들이 주로 내뱉는 말이다. 말로 안되니 그나마 나이로라도 먹고 들어가겠다는 연장자들의 꼼수적 발언이다. 하지만 택도 없다. 요즘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를 들이대면 오히려 더 추해 보인다. 나잇값도 못한다고.


나이를 따지는 문장이 말싸움 중에 나오는 순간, 말싸움의 방향은 엉뚱한 데로 흘러간다. "나 몇 살인데 너 몇 살이야?" "네! 나이를 헛드셨군요"부터 시작하여 "나이도 어린것이 얻다 대고!"로 발전한다. 왜 말싸움을 시작했는지 본질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다음부터는 뭐 말 안 해도 싸움의 결말을 안다. 서로 식식거리며 감정만 상한다. 몸싸움 안 하고 돌아서면 다행이다. 그런데 몸싸움한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 차라리 한 대씩 치고받고 몸싸움이라도 하면 승자와 패자가 명확해진다. 그런데 말싸움의 결말은 감정만 상해 더 속상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은 동네에서 말싸움을 구경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근래 10~20년 사이에 주거지 동네에서 들리는 싸움 소리는 전혀 들어본 적도, 목격한 적도 없을 것이다. 어쩌다 술집들이 밀집해 있는 유흥가를 지날 때 간혹 소란스러운 말싸움들을 보긴 하지만 아주 희귀한 경우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온순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과 장소가 바뀌었을 뿐이다. 감정도 사회적 정서의 일부인지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공동체에서 갈등이 없을 수 없고 스트레스가 안 쌓일 수 없다. 사회에 내재된 이 갈등과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 것인지가 중요하다. 개인적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갈등을 풀고 매듭지을 축제도 열고 운동 경기를 개최하여 힘을 소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단위로 보면 역사적으로 전쟁을 획책해 내부적 갈등을 외부로 끌고 가는 잔인성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대화와 토론에 미숙한 것이 틀림없다. 갈등을 조정하는 방법이 서툰 것이다. 사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정답이 없기도 하다. 그때그때 임기응변적으로 맞춰가야 하고 설득을 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정답이 없기에 해법도 부지기수로 다양하다. 그 해법을 잘 정리하고 맞춰나가는 것을 화술이라고 한다.


화술(話術 ; narrative skill)은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말로 잘 표현하는 기술이다.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잘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설득했다. 설득당했다"는 소리는 상대가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게 잘 설명했다는 것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번지르한 말의 윤색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핵심을 끌고 가면서 이해를 돕기 위한 사례까지도 잘 가지고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의 주제와 해법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알맹이가 없이 말만 번지르한 것은 금방 눈치챈다. 사기꾼인지 아닌지 말이다.


동네 구멍가게 앞에 앉아서 막걸리 안주로 나온 두부를 하나 더 먹었네 덜 먹었네를 가지고 벌이는 아저씨들의 말싸움 정도야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동네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장기 훈수 둔다고 벌이는 소란에서는 판을 엎고 일어서는 놈이 지고 있었을 확률이 더 높다. 동네 구성원 간의 이 같은 갈등은 칼로 물 베기다. 내일 아침 또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더럽고 치사해서 이사 간다고?" 말싸움할 때만 그렇다. 이사 갈 돈도 없다. 머쓱하지만 내일 아침 또 얼굴을 보는 게 우리네 동네 정서였다. 


그러던 것이 도시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바뀌면서 시민 정서의 밑바닥도 바뀌어버렸다. 심지어 아파트 앞집이나 아래 윗집과 상투적인 인사만을 건넬 뿐이다. 한 번도 서로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간혹 얼굴을 보니 식구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알려고 하는 게 오히려 민폐로 작용할까 봐 조심스러워하기도 한다. 우리 집 얘가 거실에서 뛰어다니면 아랫집이 소음으로 불편할까 봐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다. 서로 조심하고 부담스러운 관계로 묶여있다.


공동체 사회에서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자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로 통한다. "나도 너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테니 너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가 공동 주거생활의 룰이 되어버렸다. 이는 배려라기보다는 무관심을 더 부추긴다.


낮은 담장 너머 마당에서 세수하고 물 버리는 소리, 늦잠 잔다고 큰소리치는 안주인의 목소리까지, 듣고 싶지 않아도 그저 생활 소음처럼 들려오고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던 이웃의 풍경은 곧 나의 정서이자 내 삶의 일부처럼 남아있지만 닭장처럼 살고 있는 아파트의 이웃은 단절되어야 더 미덕으로 다가온다. 편하고자 하는 마음은 몸이 편한 것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웃과 정서의 교류는 점점 멀어져 갈 수밖에 없는 틀에 살고 있다.


추석명절을 앞두고 찾아뵐 부모님이 계시고 갈 수 있는 시골집이 있고 옆집에 살고 계신 친척 어르신이 계신 모습은 아련한 어린 기억의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동네 구멍가게 앞 평상에서 "누구네 집 아들이 동남아 여행시켜 주었다"라고 자랑질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래 그 집 아들 잘 둬서 좋겠구먼"이라고 볼맨 소리하는 맞장구에 막걸리 한 모금 넘어가는 촌로의 목구멍이 보고 싶다. 추석명절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 지금 뭐가 하고 싶은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