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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16. 2023

먹는 것과 번식에 민감한 이유

생물의 세계를 단순화시켜 보면 단 두 가지 만이 의미를 갖는다. '먹는다는 것'과 '번식'이다. 그냥 까놓고 말하면 먹고 섹스하는 것이 전부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나머지는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이어지는 부수적인 행위일 뿐이고 이 두 가지를 더 잘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노력의 산물일 뿐이다. 거창하고 고상하게 예술이라고 표현하는 무수한 인간 행위들의 밑바탕조차 섹스 파트너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형이하학적이고 적나라하고 단순한 표현인가?


근본을 들여다보면 장황해지지 않는다. 너무도 단순 명료한 사실이 바탕에 놓여있다. 먹고 섹스하는 것을 인간으로만 보니 저질스러워 보이고 음란해 보일 뿐이다. 생물 종 전체로보면 너무도 자연스럽고 그 행위들이 살아있다는 존재를 정의하는 기본 단위다. 단어와 용어에 물든 편향된 시선으로 겉만 봐서는 본질을 볼 수 없다.


'먹는다'는 행위는 당연하다. 먹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기본 전제는 끊임없이 먹이를 섭취해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다. 먹지 않고 사는 생물이 있는가? 생명의 기본 존재인 단세포 박테리아에서부터 인간에 이르는 다세포동물에 이르기까지 먹는다는 행위는 생물 종의 가장 기본이다. 먹지 않고 존재하는 것을 무생물이라 한다. 바위와 돌뿐이다. 생명의 역사는 먹는 데 있다. 인간이 그렇게 먹는데 집착하는 이유의 근본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먹는다는 행위가 인간사회로 넘어오면서 특히 대량생산이 가능한 농업혁명을 거치고 다양한 품종개량으로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를 맞이하면서 음식에도 치장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생물에 있어 '먹을 것'을 가공하거나 치장을 하는 동물은 없다. 있는 그대로, 날 것 그대로의 에너지 대상으로 볼 뿐이다. 잉여가 낳은 음식문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치의 전형이다. 이 또한 잉여 먹잇감으로 파트너를 유혹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번식'의 역사 또한 먹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은 그저 섹스 행위에 내재되어 있는 말초적 감각의 흥분만을 떠올리기에 부끄럽고 감추어야 할 대상으로 볼 뿐이다. 존재 자체가 섹스 행위로 인하여 생겨난 것인데도 말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렇고 전철 옆 자리에,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고 TV 화면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섹스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에서는 그것을 가리고 감추는 것을 미덕이라 여긴다. 드러내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사회를 존속시키는 규범으로 관습을 만들고 미덕을 만들어 공생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만들었다.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만들어 사회 유지의 법을 만들었다. 인간 사회는 힘 있고 돈 있는 개체만 무소불위로 소유를 할 수 있는 구조에 강제적으로 제한을 두었다. 공생하는 현명한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런 효율적 합의가 없다면 인간사회조차 힘과 부와 권력을 가진 일부 사람만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그런 사회는 결국 존속할 수 없음도 진화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들은 왜 이렇게 먹이와 섹스에 집착할 수밖에 없나? 이유는 그 대상이 모두 자신의 바깥에 있다는 데 있다. 바깥에 있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먹고 싶다고 먹고 섹스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먹이와 섹스 대상을 추적해 찾아내야 한다. 먹이는 사냥을 해야 하고 섹스 상대는 유혹하고 힘을 보여주고 멋지게 치장하고 꾸며 관심을 끌어야 한다. 먹이 사냥을 현대 용어로 번역하면 직장을 다닌다고 하고 사업을 한다고 하며 돈을 번다고 한다. 섹스 상대를 찾는 것을 연예를 한다고 하고 결혼을 한다고 한다.


소스의 원천이 내 바깥에 있으니 어떻게든 잡고 취해야 하는 것이 본질이 된다. 그래야 살아있을 수 있기에 숙명이 된다. 어쩌겠는가? 온갖 수단 방법이 동원된다. 바깥에 있는 대상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생물이기에 움직이기에 추적하여 찾아야 한다. 움직이는 생물을 가두어 가축으로 키우고 식물의 집단재배를 통해 생산을 하는 방법을 고안해내기도 했지만 역시 먹이의 시작은 찾아내야 하는 데 있다. 냉장고를 뒤져야 하듯이 말이다.


섹스대상으로서의 파트너는 더욱 다이내믹하다. 행적을 추적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리적 마음까지도 사야 하는 이중고생을 해야 한다. 꾸미고 멋을 내고 근육을 키우고 돈 있음을 자랑질하여 파트너를 유혹하는 작전들이 펼쳐진다. 이 행위는 모든 생물 종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대상이 내 바깥에 있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자연은 그러하다. 유아독존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어떻게든 상대가 있고 상대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필연의 운명 속에 존재라는 탈을 쓰고 있다. 함께 살아야 사는 의미가 성립된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말초적 감각의 단어 뉘앙스만으로 세상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바탕을 존엄성으로 바라보면 성스러운 행위가 된다. 끼니때마다 나에게 에너지를 주고 있는 음식들에 경배를 해야 할 일이며 운명 지어져 세상을 같이 살고 있는 곁의 사람들에게 존경의 인사를 해야 할 일이다. 태어남의 시간으로부터 시작하여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자연의 원자로 다시 돌아갈 시간 동안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항상 감사해야 할 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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