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數 ; number)는 사물의 개수를 세는 인식체계다. 사물의 양을 규정짓는 결정적 구조를 만들어 존재를 드러내는 완벽한 상징의 표현이다.
수를 헤아리는 것은 생물 진화에 있어 중요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5억 년 다세포생물의 진화과정 속에 남아있는 본능이라 할 수 있다. 먹잇감을 추적할 때는 오직 하나의 타깃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먹잇감이 여러 개 있다고 해서 다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 한 놈만 집중적으로 집요하게 추적해야 그나마 잡을 수 있는 게 자연의 먹이사슬이다.
자연에서 명확한 것은 오직 하나다. 원시부족 중에는 하나, 둘 만 있고 셋을 넘어가면 '많다'는 표현으로 뭉뚱그려 표현하기도 한다. 셋 이상의 숫자가 의식의 범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숫자는 애매(曖昧 ; ambiguous)함에 확실성을 부여하는 상징이다. 숫자를 헤아려보면 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즉, 한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숫자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지만 손가락 범위를 넘어서는 숫자를 셀 때는 애매해진다. 물론 양팔의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숫자를 열까지 세고 다시 되짚어서 20까지도 무난히 셈을 하는 사람도 있고 훈련을 하여 암산으로 척척 알아맞추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이 대략적인(approximate) 애매함이 진화의 단면임을 봐야 한다. 하나, 둘의 범위를 넘어서면 '두서너 개' '네다섯 개' '예닐곱 개" 등등 애매한 숫자를 표현하는 언어들이 등장한다. '두서너 개'는 두 개 일 수 도 있고 세 개 일 수 도 있다는 표현이다. 하나 이외의 존재가 분명히 있지만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표시이다. 하나를 추적하다 놓치면 다음 표적으로 삼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여유공간에 대한 표현이다. 그렇게 애매함에 대략적으로나마 범위를 정해놓으면 범주화가 된다. 헷갈림을 두리뭉실하게 묶어놓음으로써 상징으로 승화시켜 애매함을 없앴다. 애매함을 없애는 기가 막힌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수는 사물의 순서를 나타내는 서수(序數 ; ordinal)와 양을 나타내는 기수(記數 ; cardinal)의 2종류로 나뉜다. 그런데 서수의 마지막 숫자가 기수가 된다. 숫자를 센다는 것은 하나, 둘, 셋으로 서수를 헤아려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남는 숫자가 전체 양을 가리키는 기수를 알고자 함이다. 세는 순간, 서수가 기수가 되어 완벽한 상징이 되고 범주화가 되어 상징은 하나가 된다. 센다는 것은 순서를 통해 전체 양을 헤아리는 인지작용인 것이다.
그래서 센다는 것은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 서수의 순서를 모르면 맥락을 모르게 된다. 순서가 뒤죽박죽 되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대략적인 숫자로 범주화해 접근하는 방법의 유효성은 이렇게 생물의 역사와 진화 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디테일을 찾고 정확한 숫자를 제시하고 완벽한 상태로 만들어 접근하기보다는 대략적인 숫자를 먼저 제시하고 그 숫자를 쫓아 실행에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오차 범위를 줄여나가는 것이 성공하는 지름길이 된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미적미적하는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또다시 여러 변수가 달라붙어 계획을 지체시키는 경우를 비일비재하게 보게 된다. 일단 구상을 했다면 대략적인 숫자로 바꿔보는 순서가 필요하다. 몇 명 정도 필요한지, 얼마나 비용이 들 것인지 등등 숫자로 바꿔보면 규모가 보인다. 양을 나타내는 기수가 가진 숫자의 힘이다.
애매함이 숫자를 통해 범주로 만들어지고 상징으로 전환되어 의식의 차원으로 끌고 오는 창의력의 바탕은 추상을 훈련해야 가능해진다. 상징과 상징을 결합하는 추상의 능력을 키워야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의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수의 상징에 관한 이해를 넓히는 일은 세계를 보는 관점을 넓히고 높이는 일이고 추상을 확대하는 일이다.
연산과 방정식과 미적분에 주눅 들어 수포자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문제풀이식 변별력 때문에 꼬인 인생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학창 시절 때 빼고는 미적분은 고사하고 방정식조차 평생 사용할 일이 없음을 눈치채고 분노하게 되더라도 참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기술하는 논리의 방편으로 숫자를 사용할 뿐이다. 숫자를 풀어 해석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익숙하지 않아 다가오는 불편함일 뿐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애매함을 드러내 숫자로 보여주는 것만큼 명료한 작업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숫자와 친해져야 한다.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접근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와 마주해야 한다. 당장 주식상황판 숫자가 변하고 있는데 왜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상황을 읽고 현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수는 뼛속을 지나는 혈액의 붉은 철과 같이 작동한다. 외면하지 않고 맞서서 외우고 적어봐야 한다. 하다못해 연도라도 외워 역사의 사건을 끌어들여야 문과의 정밀함이 살아난다. 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그래서 피타고라스의 '모든 것이 수다(All is number)'라는 말은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