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말이 험하다는 소리입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권력 있는 놈이 위세를 떱니다. 천박함의 극치입니다.
배려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상대의 옆에 앉아서 같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감은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그나마 상대의 앞에 앉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상대의 앞에 서 있습니다. 위압이자 위계입니다. 같이 가는 사람이 아니고 반드시 없어져야 할 적으로 규정해야 가능한 행동입니다. 천박함의 표출입니다.
감정이 격해져 있습니다. "어디 아무나 걸리기만 해 봐. 그냥 절단 내버릴 테니"라는 심정입니다. 죽거나 살거나 극단으로 치달아 있습니다. 특정한 계층, 특수한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강한 전투력이 아닙니다. 보편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입니다. 천박함의 위세입니다.
말과 행동이 거칠어질 때는 생존에 대한 동물적 본성이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강해 보여야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가장 저급한 행위이지만, 들여다보면 그것이 생존본능의 기초를 이룹니다. 이 경쟁에 돌입하면 배려나 이타심은 한낯 사치에 불과합니다. 어떻게든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동물로서 함께 살아간다는 인간성이 말살되고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만이 진리가 됩니다. 천박함의 본능입니다.
천박함을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말을 할 때 한번 더 생각하고, 행동을 할 때 한번 더 주위를 살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이것이 안되어 말실수를 하고 정제되지 않은 행동을 합니다. 말과 언어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즉시성의 발로이기에 말실수를 보정해 나가는 과정이 대화의 과정입니다. 단어를 순차적으로 형식에 맞게 배열한 것이 문장입니다. 맥락이 맞아야 뜻이 통합니다. 단어를 제대로 배열하여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행위가 제대로 훈련되지 못하면 말실수를 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정서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떤 단어를 떠올려 문장으로 끌고 올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인간은 언어가 가진 의미의 場에 갇힌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단어가 가진 언어가 감정이 됩니다. 그래서 예쁜 단어를 떠올려야 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많이 접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보는 창이 아름다워집니다. 예쁘다 아름답다고 최면을 걸고 위장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캄캄한 두개골에 갇힌 두부덩어리 브레인이 만들어내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스스로 볼 수 없고 인지할 수 없으니 화학적 전기신호를 마음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해석에는 개인적 평생 학습량이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체감했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것을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만인만색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거칠어지고 천박해지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좋은 감정을 불러올 수 있는 시인들의 감성이 널리 공유되어야 합니다. 시인들의 언어는 음률 속에서 움직입니다. 리듬이 있습니다. 편안함입니다. 거친 감성을 드러내는 선전선동의 문구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시의 영역이 아닙니다.
혹시 지금 외우고 있는 시 한 편이 있습니까? 나의 심성이 흔들릴 때 그 흔들림을 고정시켜 주는 마음의 고향 같은 시 말입니다. 거친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고 가끔은 가슴 울컥하는 그런 시 한 수 외우고 있으면 그것이 평생 자신의 심상을 이끌고 있음을 눈치채게 될 겁니다.
저는 정현종 시인의 '나 세상 떠날 때'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세상 떠날 때 나는 내 뒤에 태양을 남겨 놓으리 그 무슨 말무더기 무슨 이름 그 무슨 기념관 같은 거 말고 태양을 남겨놓으리 그러니 해가 뜨거나 중천에 있거나 하늘이 석양으로 숨 넘어가며 질 때 그게 내가 남겨놓은 것이라고 기억해 주기를"
정현종 시인의 이 시구가 평생 삶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해답을 주었습니다. 시의 무게는 이런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슴 한편을 확 휘저어놓는 그 무엇 말입니다.
"별빛이 바위에 스미어 꽃이 되었다"는 문장 하나도, 저를 10년 가까이 자연과학 공부하게 만들었습니다. 단어와 언어가 가진 힘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천박함의 본능을 줄이고 감추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훈련.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노력입니다. 어떤 것이 천박하고 어떤 것이 거친 것인지는 굳이 되묻지 않아도 스스로 다 압니다. 내가 공부하지 않고 내가 훈련하지 않아서 드러난 천박함과 거침이 있다면 가차 없이 쳐내야 합니다. 힘과 권위는 거침과 천박함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도 후광처럼 알아서 은은한 빛을 내도록 해야 합니다. 진정한 힘은 드러내지 않아도 스스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난득호도(難得糊塗 ;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기는 힘들다)입니다. 교만하지 않기를 끝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거친 사회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심의 현상입니다. 조금 덜 소유하고 조금 더 나눠주는 배려는 물질을 넘어 심상의 나눔으로까지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좀 더 살만한 곳으로, 함께 하는 곳으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