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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Oct 31. 2023

'잊혀진 계절'의 재해석

3년전인 2020년 썼던 글을 다시 봅니다. 시간은 흘렀으나 사건과 생각은 그대로 입니다.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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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참 빨리 흐르죠. 벌써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


가수 이용의 전설같은 히트곡인 '잊혀진 계절'의 첫 소절입니다. 이 노래가 밀레니얼 세대나 Gen. Z 세대들에게는 듣보잡일 테지만 8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들에게는 제목의 형용사처럼 잊지 못할 불세출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10월의 마지막은 어떤 의미가 있기에 가요의 소재가 되었을까요? 단순한 아무 의미 없는 날짜의 표기일까요? 작사가가 수없이 고뇌하며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을 텐데 무의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 날일까요?


곡 전체적 분위기는 이별을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잊혀진 계절 - 이용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 '잊혀진 계절' 유투브 동영상 url : https://www.youtube.com/watch?v=fMmgz5RS0RE )


이별과 관련된 계절을 삽입하다 보니 가을이 적당 했을 테고 그 가운데에서도 노래의 음률을 살리고 계절의 끝자락이라는 의미가 복합되어 선택된 날이 '시월의 마지막 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구월의 마지막 밤' '십일월의 마지막 밤'은 리듬에도 안 맞죠. '사월의 마지막 밤' '오월의 마지막 밤' 은 음률에는 맞지만 생명이 생동하는 봄의 시간이라 가사의 흐름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겨울이라는 긴 계절을 견디기 위해 자연이 채색을 하고 대지로 그 에너지를 돌려보내는 계절, 찬 바람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하고 쓸쓸함이 휘몰아가는 그런 느낌의 계절, 가요의 주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가을이 이별의 계절만은 아닙니다. 사랑을 싹 띄우고 가꾸어 나가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죠. 찬 바람에 연인이 손을 잡게 하고 포옹하게 합니다. 따뜻한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말입니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는 오롯이 '일체유심조'란 뜻입니다.


감정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지각을 통해 감정을 구성하고 설계합니다. 감정이 발현하는 본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어와 개념과 언어와 문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감정입니다. '잊혀진 계절'에 실린 쓸쓸함, 헤어짐, 슬픔의 단어 가사들이 감정을 좌우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면 가을의 낙엽과 오버랩되어 최고의 가을 노래로 됩니다. 하지만 천차만별의 개인 심성이 가미된 '다양성의 본질'이 감정입니다. "다양성이 본질"임은 이 노래를 신세대들은 들어보긴 했을 테지만 잘 모른다는 것이고 노래가 품고 있는 계절 감각을 공감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발현이 인간 본성이라면 같은 노래를 들었다면 같은 공감을 가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바로 감정은 개별적 학습에 의해 표상되는 심성이었기에 각양각색으로 느끼고 표현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의 차가움을 추위로 느끼는 것도 바로 감정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아침인사는 다들 "춥죠"입니다. 회사 로비에서 마주친 보안담당 직원의 첫인사도 그렇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먼저 출근한 선배들의 인사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추운지 잘 모르겠습니다. 춥다기 보단 약간 쌀쌀함, 아니 시원함을 더 느낍니다. 폴라 티에 카디건을 입어서 그런가요? ㅠ.ㅠ


아니 그보단 심성의 경중이 따뜻함에 더 가까이 있기에 그런 이유일 것이고 사실 이 아침 온도는 영상 6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도의 체감도 만인만색의 감정으로 표출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자연은 공통을 지배하는 것이 틀림없음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일반의 룰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온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온도가 어제보다 내려갔을 것이라는 단순한 연결고리는 공통의 공감대를 갖고 있기에 언어적 표현도 자연스럽게 같게 되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보편성을 이야기할 때 들이대는 비유의 개념은 이 아침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어떤 현상을 놓고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이 평생 학습해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시각차를 알아보는 대표적인 사례로 gestalt switch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젊은 여자로도 보이고 늙은 여자로도 보이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어떤 시각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시각차가 다를 수 있음을 증명 같은 예시를 통해 시각차가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복잡한 의견 충돌과 표출이 다양성의 표현을 넘어 이 시각차의 늪에 매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쪽만을 바라보도록 사회가 강요되고 교육되어 왔기에 합리성이 사라진 사회가 된 듯한 인상입니다. 비판을 해야 지성인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은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비난은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대표적인 우화가 있습니다. 부부가 말을 타고 가는 우화입니다.


같이 말을 타고 간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난을 합니다. 말 한 마리에 부부가 같이 탔으니 말이 얼마나 힘들겠냐고 인간들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고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남자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걷고 여자만 위에 앉아 갑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또 비난합니다. 남자가 고생 고생해서 말을 샀을 텐데 어찌 여자가 말 위에 혼자 앉아 가느냐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여자가 내려서 남자보고 타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또다시 남자를 비난합니다. 아내를 위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는 야박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남자도 내리고 여자도 내려 말과 함께 걷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바보같이 말이 있는데도 걸어간다고 비난을 합니다.


비난을 위한 비난은 끝없이 할 수 있습니다. 책임도 없고 힐난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앞뒤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전형적인 저질 이데오로기 현상입니다.


상대의 긍정을 봐주고 밝음을 받아들이고 상대의 단점까지 보듬어주어야 함은 이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끌어내려야 자기가 사는 치열한 경쟁의 상존 속에서 어불성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통용되고 인정되는 보편화된 지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체'하는 지성이 아니라 희생이 그 안에 있는 진정한 지성 말입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 잊혀진 계절의 잊혀진 하루가 아니고 각인되어 영원히 기억될 '그 어느 하루'를 맞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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