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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02. 2023

이름을 불러주어야 존재가 된다

회사 건물 로비에 '일우 스페이스'라고 무료 관람이 가능한 갤러리가 있다. 리볼빙 도어를 지나 로비로 들어서면 왼편에 탐앤탐스 커피숍이 있고 조금 더 들어오면 양편으로 갤러리 공간이다. 이 공간을 지나야 건물 여러 층으로 옮겨주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이 갤러리에 전시되는 작품들의 교체주기는 대략 한 달 정도 되는 듯하다. 전시준비 기간을 빼면 1년에 대여섯 번은 전시 작품이 바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매일 출퇴근하며 수없이 드나들었을 로비 공간에 있는 갤러리를 몇 번이나 들어가 보았나 반문해 본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1년에 두서너번 발길을 들인 것 같다. 그것도 작품을 보고 싶어 들어간 것이 아니고 점심약속으로 로비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는데 만나는 사람이 조금 늦게 오는 경우, 시간 때우기로 찾아들었던 경우다.


"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흔히 들어서 알고 있는 피카소나 램브란트, 달리, 박수근,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 아니어서 그런가? 무명작가의 작품들이기에 개무시했던 것은 아닐까? 등잔밑이 어둡다고 매일 볼 수 있어서 그저 무심코 지나쳤던 것일까? 아니면 매일 지나치면서 그냥 힐끗힐끗 작품들을 일견 했기에 봤다고 치부해 버린 것일까?


기회는 늘 내 주변에 널려있음에도 그것이 기회인지조차 모르고 지나쳤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비싼 관람료 내고 찾아가던 미술관도 있는데, 허울만 남아있는 가면의 심리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본다. 우리는 전시회가 시작되면 누구의 작품인지를 먼저 묻는다. 해당 분야에서 유명한 사람인지 아닌지 파악해서 전시회의 수준을 정해버린다. 그리고 "나도 가서 봤어"정도의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가 되어야 예약을 하고 찾아간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작가의 작품 전시든 무명작가의 전시든, 이름을 내걸고 하는 전시에는 해당 작가의 일생과 작품세계가 오롯이 들어가 있다. 전시회마다 의미가 있다는 소리다. 전시회에 들어가 작가의 세계를 보는 생각과 시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작가는 자기의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 줬기에 유명해졌을 것이 틀림없다. 특히 비평가나 논평가의 눈에 들었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예술작품에 문외한인 나는 그 그림이 그 그림이고 그 사진이 그 사진 같다. 남들이 좋다고 하고, 잘 그렸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다. 그래서 회사 로비에 있는 갤러리를 하루에도 서너 차례 오고 감에도 그냥 무심했던 듯하다.


나름 그림을 보고 클래식을 듣고 오페라를 보는 문화예술에 관심이 없거나 문외한은 아닌 듯하다. 회사가 있는 건물 뒤편이 서울시립미술관이다. 가끔은 약속이 없어 점심식사를 회사식당에서 일찍 먹는 날이면 산책 겸 시립미술관을 찾아 전시되는 작품들이 뭐가 있는지 보곤 했다. 하도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전시된 작품에 붙은 해설이 잘못 표기된 것을 보고 미술관에 알려줘서 설명문을 바꿔달게 하기도 했고 점심시간에 도슨트의 설명이 있는 시간이면 따라다니며 귀동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행위들이 대부분 '지적 호기심'을 넘어 '지적 허영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예술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고자 하는 욕망에 지나지 않았음에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누가의 작품 전시를 보았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전시에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뜻과 의미를 알아챘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았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기본인데, 여태 기본도 못 갖추고 있었단 말이야"라고 다그치면 할 말이 없음도 고백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눈은 까막눈이었음을 말이다.

어제 점심약속된 지인을 로비에서 기다리는 동안 잠깐 갤러리를 들어갔다. 다른 공간에 작가 2명의 작품들이 따로 걸려 있다. 관객이 아무도 없다. 갤러리 한쪽 공간에 온통 고라니 얼굴 사진만 30여 장 걸려있다. "뭐야 이거! 똑같은 고라니 초상화를 걸어놓다니"라는, 막연히 무시하고 싶은 허세가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데 전시장 한편에 놓인 작가 노트가 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문선희, 전시회 제목은 '이름보다 오래--된(Older than Name)이다.


그리고 작가노트의 첫 문장을 힐끗 읽는 순간, 머리가 띵 했다.


"처음으로 길 위에서 사슴을 만났던 날, 나는 깨달았다 고라니와 노루 둘 다 이름만 익숙할 뿐 서로 어떻게 다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아는 것은 고작 이름뿐이었는데 그간 어떻게 그들을 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일까?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신비를 하나의 단어로 덮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눈길은 벽에 걸린 30여 장의 고라니 초상화로 옮겨졌다. 모두 같은 얼굴인 줄 알았는데 순간 모두 다른 고라니의 얼굴로 보인다. 


내가 매일 지나쳤던 이 갤러리 공간에 무수한 기회의 순간들이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었음을 직감했다. 알아야 보이는 현상은 여지없이 머리를 강타하고 가슴과 눈을 부끄럽게 했다.


브레인 안에 의미기억의 렉시콘으로 저장되어 있는 단어들이 갖고 있는 대명사 속에 수많은 존재들이 매몰되어 있고 그 존재들 각각에 이름표를 붙여줘야 그제야 개별 존재의 의미로 살아나고 다가온다. 의미기억을 일화기억으로 되살리는 일. 그 단초가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작가는 이름 뒤에 감춰져 있던 개별 존재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통찰하는 시선을 엿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갤러리에 들어가 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매일 오며 가며 각각의 고라니가 어떻게 다른지 들여다보기로 했다. 저 사진작품 속에는 작가의 감성을 깨워준 '초코'라는 녀석의 얼굴도 분명히 있을 텐데 알아맞혀 보기로 했다. 나중에 작가에게 물어봐야지, 어떤 사진이 '초코 얼굴' 인지.


그리고 김춘수 시인의 '꽃'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그래 존재는 이름 불러져야 그제야 모양을 갖추고 치장을 하고 웃음을 짓고 손짓을 하고 포옹을 하는 거야. 그제야 사랑을 하는 거야. 그런 거야.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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