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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Nov 28. 2023

개와 고양이를 모시고 산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가축이라고 한다. 개, 고양이, 소, 돼지, 말, 닭, 오리 등등을 일컫는다. 인간의 식량 확보 차원에서 야생동물을 길들였다는 학술적 관점은 일단 버리고 들여다보자. 이미 개와 고양이와 같은 경우는 가축이 아닌 식구의 개념으로 변한 상태다. 언감생심, '먹을 것'으로의 존재로 바라봤다가는 온갖 비난의 화살을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만큼 동물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은 변했다. 육식을 통해 에너지를 보충했던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재정의를 내려야 할 때가 이미 도래한 것이다.


가축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다. 길들이다 못해 인위적 교배를 통해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귀여운 형태를 갖도록 번식시켰다. 개는 철저히 인간에 의해 생물학적 진화를 한 동물이 되었다.


가축은 길들이기가 가능하냐는데 방점이 있다. 수많은 포유류 중에 개와 고양이보다 더 덩치 크고 더 멋있는 동물도 많다. 사자, 호랑이는 기본이고 가죽이 멋있는 표범도 있고 고기의 양으로 따지면 코끼리만 한 동물도 없을 것이며 귀엽기로는 사슴도 있다. 멋진 갈기를 뽐내는 사자를 길들여서 데리고 다니면 얼마나 멋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동물은 길들여지지가 않는다. 아니 사실 인간은 이들 사자와 호랑의 먹잇감이었다. 감히 피식자인 주제에  사자를 애완견 데리고 다니듯이 한다고? 택도 없는 오만이다. 동물의 생태계는 변한 것 같지만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길에서 호랑이를 마주했다면 벌벌 떨어야 하는 게 인간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육식동물인 사자, 호랑이 등은 재외 한다고 치고 기타 초식동물들이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두려움'에 예민한 동물이기에 그렇다. 동물이 위험을 감지했을 때 하는 행동은 3가지가 있다. '얼어붙기'가 그 첫 번째다. 위험을 감지했을 때 꼼짝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 동작은 이미 캄브리아기 생명의 폭발시기를 지배했던 모든 다세포 생물이 장착하고 있는 생존 본능이었다. 이 본능을 넘어선 것이 '도망가는 회피 본능'의 발현이다. 위험한 현장을 가장 빨리 벗어나는 방법이 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위험과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다. 일단 살고자 하면 도망치는 게 더 현명하다.


그리고 좀 더 진화한 포유동물로 오면서는 '사회화'라는 기술을 터득하는 종이 만들어졌다. 힘 있는 놈에게 복종하고 엎드리면 폭력으로 제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힘의 서열을 정하고 그 힘에 맞게 순서를 정해 역할을 하는 것은 동물 사회 어디에나 있는 본능적 모습이다. 인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아니 인간은 더 철저히 사회화 과정을 익히고 학습을 통해 전수를 하는 고단위 전술을 구사하는 영리한 종이 되었다.


사슴이나 얼룩말 같은 동물은 두려움이 너무 강해 일단 행동을 멈추었다 도망가는 기술을 장착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두려움을 삭이고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이 길들이기의 첫 단계다. 가축화된 동물들을 제외한 야생동물들은 이 길들이기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집에 있는 반려견은 어떤가? 아침 출근할 때 유일하게 현관에 나와 꼬리 흔들며 배웅하는 존재다.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늑대를 길들여 개로 만들었다면, 이제는 개가 사람을 길들여, 자기의 생존에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꼬리 쳐주고 손 하면 앞 발 내밀어주고 앉아하면 앉고 굴러하면 구르고 이보다 더 편한 일이 있을까? 말만 잘 들으면 꼬박꼬박 사료 주고 먹을 거 챙겨주지, 집안에서 같이 사니 더우니 추우니 신경 안 써도 되지, 아마 얼마 안 있으면 털도 귀찮고 필요 없어 털 없는 개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털 없는 개는 귀엽지 않아서 호감을 얻지 못하려나? 개들의 가장 큰 근심거리였을 언제 잡혀먹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없앴으니 개의 천국시대가 도래했음이 틀림없다. 온갖 귀여움과 애교를 부리면 부릴수록 사랑받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교활하고 깜찍한 녀석들임에 틀림없다.


사실 인간의 욕구를 위해 길들였지만 오히려 인간이 노예가 된 사례들은 관점을 달리해 보면 여러 개를 찾을 수 있다. 쌀과 보리, 밀 등 인간의 주식으로 재배하는 한해살이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들이 새싹을 띄워주고 심지어 심어준다. 병충해 안 생기도록 약도 쳐주고 수확기가 되면 낱알을 잘 모아서 저장도 해주고 다음 해에 또 번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폭풍한설, 비바람을 모두 이겨내야 하고 언제 어떻게 야생동물들에게 짓밟혀 쓰러져나갈지 노심초사하며 서 있어야 한다. 인간이 잘 돌봐주는 덕에 다른 근심 걱정 안 해도 된다. 낱알을 많이 열게 하면 인간들로부터 보호받고 사랑을 받는다. 벼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노동력을 잘 관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인간이 가축을 만들고 벼를 심는다고? 관점을 바꾸면 인간이 가축과 벼의 집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길들이기의 혜안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속 여우의 대화 속에 들어있다. 


"난 너하고 놀 수가 없어. 난 길들여지지가 않았거든" "길들여진다는 게 뭐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 필요하게 될 거야.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테니 나도 너한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고"


길들이기가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길들이고, 길들여지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길들여진 사람이 내 옆에 있는가? 집에 있는 반려견과 반려묘에게 하는 것처럼 집사 역할을 기꺼이 하는 상대가 있는가? 고민을 토로하고 마음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가? 사회화의 바탕에는 이렇게 나를 드러내 보여주고 신뢰를 쌓아 감정까지 공유하는 길들여지기 과정이 있다. 다정함에 길들여지고 편안함에 길들여지는 것이 사회화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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