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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Dec 05. 2023

생명의 코드 - 항상성과 일관성

생명을 물리적 상태와 심리적 상태로 나눠보자. 몸이라는 육체적 존재를 물리적 상태라고 보고 그 육체 안에서 추상을 만들어내는 상태를 심리적 상태라고 단순화시켜서 들여다보자. 물리적 상태인 육신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는 운동이고, 심리적 상태인 정신은 기억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지난한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상태를 시간적으로 100년 정도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단순화시켜 보면 명확하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생명의 특성 중 하나가 항상성(恒常性 ; homeostasis)이다. 자신에게 최적화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힘이다. 최적화된 상태는 한 점, 한 숫자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범위를 갖는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매년 하는 건강검진에서 받아 들게 되는 혈당 수치, 혈압 수치, 콜레스테롤 수치 등이 모두 이 항상성의 범위 내에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흔히 알고 있는 정상범위라는 것이 항상성의 지표다. 혈압으로 보면 수축기 혈압 120mmHg, 이완기 혈압 80mmHg 유지를 권고하고 그보다 높거나 낮으면 경계를 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체온도 마찬가지다. 항온동물인 인간은 평상시 체온을 36.5도로 유지해야 한다. 체온이 20도 아래로 내려가면 신체의 단백질 움직임이 둔화되어 한여름에도 얼어 죽는 현상과 동일한 사고가 나게 된다. 반대로 체온이 38도로 2-3도 올라가면 발열(fever)로 분류할 정도다. 신체 특정 부분에 문제가 생겨 면역시스템이 활성화되어 병원균과 싸우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해열제를 먹는 응급처방을 하게 된다. 또한 열이 불과 4도 정도 높아진 40도까지 오르면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생명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신체에 있어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죽고 사는 경계선 사이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항상성은 특정 범위의 영역에서 분자패턴이 일정한 비율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생명조절은 이 두 경계점 사이를 적절히 왕복하는 균형 잡기 게임이다. 생명이라는 천칭의 무게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끊임없이 살피고 경계하는 일을 '산다'라고 한다. 부족하면 채우고 넘치면 덜어내야 한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것을 살아있다고 한다.

생명이 고정되어 있으면 그것을 죽음이라 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명확한 사실은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을 살아낼 뿐이다.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명을 얻어 이 세상에 등장했다. 그냥 얻어걸린 것이다. 무조건 살아내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거의 100년 동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쩌겠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말이다. 이 고민은 생명이래 인간이 숙고해 온 최대의 난제다. 그렇지만 오히려 해답은 간단한데 있을 수 도 있다. 그냥 살면 된다. 산다는 것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바로 물리적 신체가 만들어 낸 화학적 전기작용의 반복 적응에 따른 심리적 상태가 세상을 보는 눈을 만든다. 실제 하는 물리적 세계를 재조합하여 추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외부 세계를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 기억을 만들고 지각을 만들고 생각을 만든다. 각자마다 만들어내는 세계관은 일관성(一貫性 ; consistency)이 생명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세계관, 이미지, 믿음에 모순되지 않으려는 힘이다. 일관된 자기 정체성과 믿음을 유지하려는 힘으로 인해 허구적으로 꾸며지기도 하지만 그 일관성이 그 사람의 존재가 된다.


항상성을 얼마나 잘 유지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남은 생명의 시간을 말해주고 일관성을 얼마나 견지하느냐가 그 사람의 확신과 됨됨이를 말해준다. 항상성과 일관성은 생명의 본질, 인간의 특성이다. 항상성을 놓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한 신체적 움직임이 필요하다.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은 운동이 아니다. 건강을 위한 별도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찬바람 불고 춥다고 집안 거실에서 리모컨을 끼고 살면 항상성이 무너진다. 귀찮지만 거실바닥에 요가 매트라도 깔아놓고 스트레칭이라도 해야 한다. 그 일련의 과정이 항상성을 유지하는 길이다. 놔둬도 유지되는 그런 천운은 없다. 산다는 것은 지난한 움직임이기에 그렇다. 움직임이 멈추는 그날까지 움직여야 하는 게 생명의 숙명이다. 태양과 지구가 만들어 놓은 생명의 업보다.


언제 갈지 모르지만 끝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이왕 움직일 거 즐겁고 행복하게 움직여야 한다. 어떻게 여행도 가고 피트니스센터도 가고 수다도 떨고 정신건강을 위해 공부도 하고, 노래도 하고 기타도 배우고 탱고도 배우고 골프도 시작하는 등등, 움직일 일이 너무도 많다. 하지 않았고 시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자. 하자. 항상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되었든 시작하고 도전하자. 그러고 사는 게 산다는 것이다. 생명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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