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Dec 11. 2023

아직도 끝내지 못한 이유가 있다

견리망의(見利忘義 ; 이로움을 좇느라 의로움을 잊는다).


2023년을 돌아보며 우리나라 교수 사회가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다. 교수님들께서 왜 이 사자성어를 올해의 한자어로 꼽았을까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안다. 보편적 통찰이 그 사회 분위기 흐름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사자성어의 의미가 정치판에 국한되는 듯하여 아쉬움이 남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치는 그 사회 최고의 집단 행위이다. 사사롭다 비난하고 저 모양 저 꼴이냐고 목청높이지만 그 판에 들어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게 원래 정치다. 치고받고 주먹질 오가는 진흙탕 싸움을 말싸움으로 공개적으로 바꿔 놓은 것이 정치판일 뿐이다. 말싸움하는 수준 차이의 정도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당신이다. 나는 안 찍었다고 항변해 봐야 소용없다. 당신이 잘못 선택했기에 벌어진 현상이니 끌어안고 가야 한다. 아니 참아야 한다. 짐 싸들고 낙향하여 고립무원으로 사는 게 현명할지 모르지만, 모래 속에 대가리만 파묻고 온몸을 드러낸 타조와 다름없다.


세상은 그렇게 외면하고 회피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해야 그나마 변하는 시늉이라도 한다. 호모 사피엔스 인류사가 그렇다. 극복과 투쟁의 피비린내가 알알이 스며들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살아내야 한다는 숙명은 항상 새롭게 이겨내야 하는 모순으로 되살아난다. 인류 역사 내내 그렇게 투쟁하고 싸웠음에도 아직도 끝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추상과 경험은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은 허상이고 추상이다. 세대가 거듭된다고 DNA에 각인되지 않는 것이다. 경험조차 바늘에 찔린 내 손가락의 아픔일 뿐이다. 사회적 밈조차 그 시절 그때뿐일 때가 많다. 오히려 세대가 이어질수록 복잡해지고 해석도 난해해진다. 매번 새롭게 학습하고 새롭게 세팅하고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관습을 만들고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 유전처럼 전해줄 수는 있으나 그것도 익히고 공부하게 주입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대한민국 헌법이 부칙을 제외하고 10장 130조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알고 있는 조항이 딱 두 개밖에 없다. 제1장 제1조 1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나마 온갖 영화와 대중매체를 통해 수없이 들어왔기에 외우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 10장 130조에 달하는 헌법 내용은 사실 내 알 바 아니다.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니 헌법이라는 것을 들춰본 적 도 없다. 내가 사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않았고 아무런 장애가 되지도 않았고 시험에 나오지도 않았다.


사사로운 이로움이라는 것이 일개 개인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 나에게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싫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범인들의 욕망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사사로운 이로움에 대한 정의다. 누가 누굴 욕하고 누가 누굴 비난하며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다만 조건과 상황, 서있는 위치에 따라 다르다. 범인들의 사사로운 행동이야 생존 본능이다. 하지만 부여받은 권력의 자리에서는 달라야 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사로운 이득은 내려놓기를 원한다. 정치인들이 그렇게 인용을 잘하는 '국민'들은, 권력을 이용해 사사로움을 챙기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국민들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봉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철저히 정치인으로 살아야 한다. 사사로이 부를 탐하던 탐욕으로 권력을 수단화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사사로움을 챙기고자 하는 자는 그 자리에 가면 안 된다. 사사로움을 챙기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물러나거나 고사하는 게 맞다. 사사로운 자는 정치보다는 장사꾼을 하는 게 맞다. 괜히 버티다가는 망신만 당하고 물러나면 쪽팔림만 남는다. 사회가 그나마 이런 인물을 골라내는 정도는 하고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매년 선정되는 사자성어 중에 긍정적 표현이 뽑혔던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없는 듯하다. 2022년에는 과이불개(過而不改 ;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 2021년에는 묘서동처(猫鼠同處 ; 고양이와 쥐가 한 곳에 있다), 2020년에는 아시타비(我是他非 ;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가 선정됐다. 암울했던 세태를 보는 해학적 표현이 대신하고 있다.


현상을 지적했으면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혀만 끌끌 차고 "에효 이런 더러운 세상"이라고 한탄만 해서는 내년에도 비슷한 부정적 한자성어를 다시 뽑을 수밖에 없다. 내년에는 견리망의가 아니라 견의망리(見義忘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런 인물이 등장할 수 있을까?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인물이긴 하다. 종교계에도 존경받는 성직자가 없고 정치판에도 추앙받는 인물이 없다. 오직 연예계에만 아이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영웅이 나오기에는 세상이 덜 힘들고 덜 썩어서 그런가? 

작가의 이전글 세상을 보여주는 수준 차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