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Dec 13. 2023

종교의 새로운 해석

내 주변엔 친한 성직자 친구들이 여럿 있다. 종교를 가리지 않는다. 절에서 용맹정진하는 스님도 있고 성공회 신부도 있으며 개신교 목사도 있다. 의외로 친인척 중에는 성직자가 한 명도 없다. 보통은 부모나 가풍의 종교 성향에 따라가기 마련인데 우리 집안은 종교와 별 인연이 없어서 그런 듯하기도 하다. 나만해도 그렇다. 질풍노도의 시절에 교회오빠를 하기도 했으나 대학에 입학하면서 발길이 뜸해지더니 지금은 아예 나의 관심사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렇다고 집안이 아예 종교와 무관하냐? 그것도 아니다. 둘째 누님은 언제나 주일 예배를 가시고 1년에 한 번씩 구약 신약 성경 완독을 이어가시는 절실한 개신교 신자다.


그런데 내 주변의 종교인들은 특징이 있다. 나에게 절에 와보라, 교회에 와보라, 성당에 와보라고 한 번도 권유한 적이 없다. "저 놈은 아무리 신앙을 가지라고 꼬셔도 안 넘어갈 놈"으로 찍힌 모양이다. 심지어 집안의 누님도 나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일반 신앙인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성직자들은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심도 들긴 한다. 평신도들이야 헐랭이 신앙인이어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의 행위를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이 믿는 종교가 더 확산되어 교세를 넓히는 전사가 되어야 하기에 기를 쓰고 복음 전파에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내 주변의 성직자들은 모두 헐랭이 종교지도자들일까?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도 낮은 곳에서 주변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말없는 선행을 보여줄 뿐이다. 진정한 성직자들이다. 내 주변의 성직자들은 몸으로, 생활로  종교의 가치를 보여주고 타인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는 고도의 전략가들인 듯하다. 내가 아는 주변 친구 성직자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간혹 인간말종 종교인들이 종교를 사익편취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수없이 언론을 오르내리며 먹칠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혹자는 한국이 종교의 자유가 가장 발달한 나라라고 한다. 개종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고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있음에도 큰 다툼 없이 지내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것이다. 심지어 사이비 종파까지 경제 활동을 앞세워 득세하고 있는 나라이니 가히 종교의 천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 주제 중에 가장 피해야 할 것이 정치와 종교 이야기라 한다. 그만큼 철저히 개인주의적 산물이라는 소리다. 물론 강한 자기주장으로 얼굴 붉히고 말다툼을 하기 싫어 회피하고자 함이 우선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이 룰이 귀신같이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서양의 어느 종교 영향이 큰 탓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한 풀 죽는다. 바로 한국의 종교는 종파를 뛰어넘는 현실주의가 그 위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현실 인식이 강하다. 내가 잘 돼야 하고 내가 잘 살아야 하고 내 가족과 내 지인이 잘 사는데 문제없어야 한다. 기복신앙이 철저히 잠재되어 있기에 믿음의 방법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듯하다. 굳이 삶을 사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믿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종교적 의례로 어떤 절차를 따르느냐는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그것조차 자신이 의지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실 오늘 종교 이야기를 은근슬쩍하는 이유는 여러 연말 송년 모임에, 그래도 얼굴 한번 보고 한 해를 마무리하자는 의미에서 고위 성직자들도 모임에 호출을 하는 와중에 절에 있는 스님 친구가 '정월 15일까지 동안거 중'이라는 문자로 대신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면벽수도 용맹정진하는 와중에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말이야?"라는 속세의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속세의 의심에 해답을 주는 문자이기도 하다. 역시 속세를 뛰어넘는 내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스님 친구는 매년 연말 모임에 한 번도 오지 못했는데 바로 겨울철에 바깥출입을 금하고 수행정진하는 '동안거(冬安居)' 기간과 겹쳐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에도 피정(避靜 ; retreat)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서 자신을 둘러보고 고요함을 찾는 시간이 있다.


그러다 문득 90일 동안 동안거에 들어간 스님 친구는 하루종일 면벽수도 하며 어떤 화두를 잡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잡고 있는 화두를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5초도 못 버티고 잡념이 들어오고 상념이 지배하는 브레인의 세계에서 어떻게 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들은 특별한 비책을 가지고 있을까? 얘기 들어보면 그런 비책은 없단다. 끊임없이 한 생각 놓지 않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앉아 참선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매 순간 잡념에 걸려 넘어지고 좌절하고 반나절 지나면 온갖 상념에 휩싸여 방문 열기를 수차례 한다는 것이다. 


면벽수도하는 스님 친구가 그럴지언대, 우리 같은 속세의 범인들이야 한 생각 잡고 이어간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위안이 된다. 사실 매 순간순간 잡념으로 뒤바뀌는 생각은 인간 진화의 현장이다.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해야 하는 피식자의 생존 본능인 것이다. 한 생각 이어가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말자.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것이 종교다.


작가의 이전글 두개골 밖의 브레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