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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23. 2024

사건은 당사자가 해결해야 한다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고 치자. 어떤 사건이냐와는 관계없이 그냥 사건이라고 단정해버리고 보자. 누가 그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까? 당연히 사건에 개입하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법적인 용어로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소리다.


사건이 잘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이 화해를 하면 간단하다. 그렇지만 사건이 그렇게 단편적이지가 않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개입되고 상황에 따라 묘하게 돌아간다. 각자의 입장이 가미되고 감정이 섞이면 배는 산으로 간다.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꼬여간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사람이 나타나기를 신화처럼 기다린다.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해결사가 나타날 것인가? 신화의 세계가 아닌 다음에야 택도 없다.


그렇지만 유일한 길이 있긴 하다. 당사자가 나서는 일이다.


홍보를 평생직장일로 한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진행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고 지켜보며 어떻게 결말로 갈 것인지를 유추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정답은 없다.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며 양념처럼 가미되는 요소들이 사건의 뱡향을 끌고 가기에 그렇다.


간혹 업무상, 사람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지인들로부터 자문을 해오는 경우가 있다. 사람 일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사건 당사자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문제다. 당사자가 사건에 대해, 전혀 잘못하거나 실수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방법이 없다. 그런데 사건 당사자 외의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건이 조작되었을지언정 사회가 인정하는 수준 범위 내에 있느냐의 문제다. 이 인식의 차이를 넘어서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사건이 극한으로 치닫고 나서야 깨닫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는다.


사건을 빨리 종결짓는 데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어떤 일이든 타이밍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 있겠냐만은 그 타이밍은 당사자가 빨리 자신의 행동이나 언행에 대해 외부의 시선을 인지하는 시간의 중요성이다. 초기 진압의 타이밍을 놓쳐 감정과 이권이 개입될 시간을 주고 나면 온갖 사람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게 되고 정답은커녕 해답도 못 찾고 수렁으로 빠지고 만다.


그래서 타이밍도 문제지만 제일 큰 문제는 당사자가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시각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 당사자의 언행에 실수가 있다고 있다고 본인이 인정하느냐에 달려있다. 인정하지 않더라도 사건이 빨리 수습되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설득해서 사과하게 해야 하는데 이게 안된다.

왜? 사건의 당사자를 설득하는 일이 애초에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건 당사자가 자기는 이용당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절대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 당사자의 인성과 인품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당사자를 설득해야 하는 사람들은 더욱 난감해진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데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조직 내에서는 절대 불가하다. 조직 내에서는 빗발치는 여론에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가 잘못했다고 절대 언급할 수 없다. 당사자의 언행은 어떤 것이 되었든 항상 옳아야 하고, 옳다고 항변해야 하고 설사 잘못되었다고 해도 피해자라고 주장해야 한다. 보편적 피해자 입장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시간만 지나고 말은 꼬여간다. 말꼬리가 계속 밟혀 온갖 것들이 다 들춰진다. 그때가 되면 무마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당사자를 주위에서 설득하여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하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사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계속되는 말이지만 당사자가 제일 중요하다. 인격과 인품이 있다면 사건도 만들지 않았을 테지만 어찌 완벽한 인간으로 살 수 있겠는가? 실수도 하며 사는 게 인간이다. 그렇지만 실수를 했을 때 빨리 인정하고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이자 사건해결의 열쇠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실수를 한 사람을 보는 시선이기에 중요하다. 이 사회의 시선을 관대하게 끌고 갈 것인지, 비난으로 점철된 함성으로 끌고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포인트가 된다. 본인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는 데까지 물고 늘어질 사람은 드물다. 인간말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타는 하지만 가벼운 실수로 치부해 버리고 지나갈 수 있다. 상대방이 더욱 악의적으로 이용해 먹을 거라는 우려는 사회의 시선을 한쪽만 보기 때문에 그렇다. 사회의 성숙도를 말하는 대중적 아량은 그렇게 옹졸하지가 않다. 아무리 양극단으로 분리된 사회로 치닫는다고 해도 사회의 저변을 흐르는 기본 원칙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하나. 사과에는 반드시 진심이 담겨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지는 방법론적인 기술이 필요하긴 하지만 변명하듯 사과문 정도 발표해서는 오히려 진실성이 없다고 역공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미 사건이 상당기간 흐른 다음에는 사과의 효용성도 비례해서 줄어들게 된다.


빠른 타이밍에 당사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전제되어야 그나마 사건이 종결될 기미를 보일 수 있다.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회자되겠지만 당사자가 감내해야 한다. 이미지 쇄신을 위해 끊임없이 자제하고 노력해야 한다. 자기가 사회적으로 어떤 자리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 위치에서는 무엇을 하면 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알았다면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을 테고 감히 장난질 치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홍보실무자들이 사건을 포장하고 감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게 먹혔던 세상은 이미 지났다. 본질이 그대로 있는데 아무리 미사여구로 포장해 봐야 아무도 믿지 않고 오히려 포장을 뜯겨 본질이 드러나면 더 비참해질 뿐이다. 당사자가 그 자리에 대한 품격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게 맞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참 어려운 난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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