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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an 30. 2024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은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는 장소가 중요하다. 부족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과 안정된 사회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는 북유럽 어느 곳에서 태어나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경제적으로 돈이 많고 적음은 부차적인 문제다. 태어나는 장소가 한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선진국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유아보호소에 입양되었다고 쳐도 기본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들은 사회와 국가가 일정 부분 보장할 확률이 분쟁지역 유아보다는 확실히 높은 것은 자명하다.


인간 존재의 출발은 여기서 시작된다.


바로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대지와 바람과 구름과 강과 바다가 마을과 도시의 사회 구조를 결정하고 사회구조가 언어의 구조를 만들고 언어의 구조가 생각의 구조를 결정한다. 생각은 자연환경에서 발원하고 인간 존재를 규정한다.


서양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그리스는 큰 강이 없다. 강수량도 연 400ml 이하라 홍수 범람이 없다. 협업으로 막아낼 홍수가 없다 보니 개별 도시국가인 폴리스들이 발달했다. 반면 큰 강 주변에 도시를 형성한 동양에선 범람하는 강의 치수를 위해 사람들이 협업을 해야만 했다. 거주 환경이 도시의 형태를 만들고 사람의 관계를 형성하고 인식의 범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서양은 개체성을 중요시하는 명사로 세상을 보고, 동양은 관계성을 중요시하는 동사 위주로 세상을 본다"라고 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관점 차이를 보여주는 실험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원숭이, 사자, 바나나'를 유사한 것으로 묶는 실험이다. 서양인들은 원숭이와 사자를 묶고 동양인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다. 바로 서양은 유사점으로 분류하는 관점이고 동양은 관계로 분류하는 관점이다.


분류는 유사한 것끼리 나누는 것이다. 분류를 할 수 있어야 공통부분이 정해져 객관화가 가능해지고 유사성과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분류는 명사로 가능해진다. 동사는 분류가 어렵다. 서양에서 현대 과학이 발전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명사적 관점의 분류가 가능한 언어적 인식체계였기에 가능했다. 동양적 관계 중심의 동사적 사고는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데 기여한 바가 전무하다. 동양에서 달과 샛별은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게 하는 고즈넉한 한 밤의 정취일 뿐이다. 달과 화성에 로켓을 보내고 인간의 발자국을 찍고 싶어 하게 하지 않았다. 아니 관계중심의 동양적 사고는 아예 달로 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서양은 유사성의 분류를 잘했기에 우주로 나아가는 사고로 까지 발전시켰다. 차이는 그냥 그러 난다. 보면 안다. 하지만 유사성은 찾기가 어렵다.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에너지의 유사성을 찾아냈고, 중력과 가속도의 유사성을 알아내 인간의 시선을 우주로 확장시켰다.


관계를 중시하는 동사적 사고 관념의 동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명사 중심 사고를 하는 서양은 자신의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본다. 과일의 황제인 "두리안을 안 좋아하니?"라고 물었을 때 동양에서는 안 좋아하면 "네"라고 대답해야 한다. 상대방 중심의 생각이기에 그렇다. 반면 서양인은 안 좋아하면 No라고 답변한다. 상대방 중심이 아니고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바로 언어의 구조가 사고의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커피 더 마실래?"의 영어 표현은 "more coffee?"로 명사 커피로 묻지만 한국어로는 "더 마실래?"라는 동사로 묻는다. 사람과 마시는 행위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의 상호작용을 묻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의 관점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그림 구도에서도 드러난다. 동양화 중에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부감 기법의 시점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서양화에서는 주변 배경보다는 중심 사물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동양인이 보는 세상은 관계로 연결된 거대한 공간이고 서양인이 바로 보는 세상은 각각의 개체가 모여 만들어진 공간이다. 동사 중심의 관점으로 보는 세상과 명사 중심으로 보는 세상의 차이는 이렇게 다르다.


나는 지금 어디에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와 산과 강이 곧 나를 규정하고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구체적으로 나무의 수종까지도 들여다봐야 한다. 은행나무가 많은지 플라타너스가 많은지 말이다. 나뭇잎 색상의 변화가 나의 심정을 결정하고 나무열매가 식생을 결정한다. 신토불이의 자연환경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 종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소중히 생각하고 가꾸어나가야 할 일이다. 그것이 나를 규정하고 나의 존재를 감지하는 일이다. 갑자기 국뽕이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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