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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16. 2024

인생은 한 토막의 이야기를 남길뿐이다

인간의 역사는 스토리의 역사다. 한 개인의 삶으로 들어와도 일생을 한 토막의 이야기를 남기고 갈 뿐이다. 이야기, 스토리, 서사(敍事 ; narration)로 엮여야 그제야 존재가 드러난다.


이야기로 엮지 못하면 존재는 그저 존재일 뿐,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물을 지칭하는 모든 명사가 홀로 존재하면 그저 존재를 나타낼 뿐이다. 존재를 존재로 만드는 작업이 스토리를 입히는 일이다.


스토리는 관계를 일관성 있게 엮는 작업이다. 바라보이는 인왕산이 단어 자체 인왕산으로만 존재하면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다. 인왕산에 눈이 내려 쌓여야 하고 비가 내려 흰 수염처럼 폭포수가 보일 때 화강암 돌산의 위엄이 스토리로 입혀져 멋지고 웅장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자연현상의 상관관계를 인과로 치환하는 교묘한 술수를 통해 인간은 믿음을 신격화해 버렸다.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인간 능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관통하는 통찰을 만들어냈다. 그 정점에 종교가 있다.


호모사피엔스 생명 역사를 관통하는 줄거리가 바로 스토리, narrative였던 것이다.


가장 드라마틱하고 잘 짜인 서사가 경전이다. 모든 경전의 줄거리는 탄탄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일관된 전개도 가지고 있다. 결과야 어떻게 됐든 기승전이 확실해 결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일목요연하다. 일관성이 사실성을 이기는 증거가 경전이다.


스토리의 끝판왕 중에는 신화가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그렇고 북유럽 신화가 그렇고 우리의 단군신화가 그렇다. 스토리로 엮이지 않은 신화는 없다. 스토리가 없으면 구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미도 없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살아남아 전해지는 신화는 다 이유가 있다. 재미있게 스토리를 엮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만 봐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어디에 있는가? 판타지 SF소설 저리 가라가 아닌가? 바로 스토리의 힘이다.


스토리의 끝판왕인 성경이나 신화는 모두 인간이 만들었다. 무엇으로? 문자로. 구전으로 구전으로 암송되어 전해져 오며 덧입혀지기를 1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이어져 왔고 그것이 문자로 남겨지는 순간, 그 확산 속도와 파급력은 전 인류를 스토리 속으로 몰아넣었다.


언어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행동을 만든다. 인간 본성의 처음과 끝, 생각의 처음과 끝이 바로 언어다. 이야기, 스토리, 서사가 모두 언어로 시작된다.

대부분 불교 경전 첫 문장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한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뜻이다. 다문제일 제자였던 아난다가 들은 붓다의 설법을 그대로 암송해서 문자로 만들어 펴낸 경전이라는 소리다. '이와 같이 들었다'는 첫 문장은 바로 스토리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기발한 발상이기도 하다. 이렇게 들었다는데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도 깨달은 사람이 말한 그 어떤 내용일 텐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다. 스토리 전개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스토리 구성은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북유럽 신화도 "길을 나선다"로 시작한다. 길을 나서야 사건과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물리칠 악마를 만나고 도움을 받을 천사를 만나게 된다. 


이야기의 핵심은 일관성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다. 횡설수설하면 이야기가 될 수 없다. '만들어진 일관성'. 이야기 전개의 핵심이다.


존재를 존재로서만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죽은 사물일 뿐이다. 엮어내 서로의 관계로 묶었을 때라야 의미가 덧입혀져 가치를 갖게 된다. 사물과 존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조차 인간이 하는 일이며 구체적으로는 언어와 말과 글로 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인간의 언어에 의해 만들어져야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산이 그렇고 바다가 그렇고 하늘이 그렇다. 외부 환경은 그저 있을 뿐이고 존재할 뿐이다. 의미로 만드는 것은 오직 인간의 언어로써만 가능하다.  자아(自我 ; self)를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발로다. 물리적으로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다. 피부와 장기와 근육세포는 한 달 전, 나의 신체를 구성했던 조직들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같은 존재로 최면을 걸고 있다. 50년 전 나와 20년 전 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나가 같은 존재라고 인식한다. 존재에 대한 사실이 다름에도 같다고 인지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성 때문이다. 30년 전 사진 속 나와 지금의 나와 같아야 자아가 유지될 수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끊임없이 물리적 자아를 속이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이 삶의 연속일 수 있다. 그래서 자아에 일관된 스토리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어떤 일관된 스토리를 엮어 남길 것인가? 가족과 친구와 사회활동과 취미생활의 모든 변수와 상황들을 어떻게 잘 버무려 나의 스토리를 짜는 양념으로 삼고 줄거리로 만들 것인가? 지금까지 삶의 스토리를 되돌아보고 구성이 잘 되고 있는지 점검할 일이다. 혹시 구성이 허술하거나 전개가 모호하다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쓸 일이다. 잘 엮은 스토리 북 한 권 남기고 가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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