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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Feb 28. 2024

배우자 생일 챙기기는 1년짜리 보험 드는 일과 같다

매일 글을 씁니다. 매일 다른 주제를 끌고 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뭘 쓸까 고민하면 그날은 2시간 가까이 자판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길게 잡고 있어도 글이 나가지 않습니다. 그냥 보이는 데로 키워드를 잡고 이어쓰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1년에 한두 번은 똑같은 주제로 쓰는 날들이 있습니다. 정해진 어떤 숫자가 그 역할을 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바로 가족들의 생일 그리고 결혼기념일 등입니다. 혹시나 직장생활을 핑계로 잊고 기념일을 지나치신 적이 있으신가요? 특히나 배우자의 생일날을 잊고 지나갔는데 아직도 한 지붕아래서 살고 있다고 하면 정말 엄청난 심성의 배우자와 살고 계신 겁니다.


아니 서로 개무시하고 있는 수준이라고요?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 지붕 아래서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림자처럼 산다는 것은 상상도 없는 일입니다.


가족들의 기념일을 챙기는 일은 구성원으로서의 임무이자 책임입니다. 가족들의 심성을 예쁘게 가꾸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관심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와이프의 생일날입니다. 와이프 생일 때마다 작은 이벤트를 하는 것으로 축하를 합니다. 자랑질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목숨부지하고 밥 얻어먹기 위한 생존 수단이라고 봐주시면 될 듯합니다. 이마저도 안 하면 1년 내내 눈칫밥 먹어야 할 듯해서입니다.

이벤트라야 사실 뻔합니다. 미역국을 끓이고 저녁에는 와이프가 선택한 메뉴의 식당을 찾아 함께 식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와이프 몰래 준비한 선물을 건네는 일입니다.


사실 지난주 필리핀 세부로 여행을 다녀온 것도 와이프 생일 축하 여행이었다고 생각하며 갔는데 와이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중으로 돈이 들게 생긴 모양새라 뭔가 뒷골이 찝찝합니다 ㅠㅠ 여행 갔다 온 것은 갔다 온 거고 생일날은 또 생일날입니다. 여행일정을 생일날이 있는 주간으로 정해서 한방에 해결해야 했는데 제가 머리를 잘못 쓴 모양입니다. ㅠㅠ


어찌 됐든 세부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파는 면세품에서 목걸이 하나를 골라 샀습니다. 최근에는 현찰 박치기로 전해주는 것을 선호하는지라 선물을 뭘로 살까 고민하는 일이 없었는데 마침 기내면세품에서 목걸이가 눈에 띄어 덥석 샀습니다. 내심은 봉투에 넣는 현금보다 싼 가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ㅎㅎ

다행히 와이프는 목걸이 산 것을 모릅니다. 세부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의 좌석이 와이프는 비즈니스석에 앉았고 저는 이코노미석에 앉아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서, 떨어져 앉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제저녁 미역국을 끓였습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는 와이프 생일상을 어머니께서 매년 챙겨주셨는데 어머니께서 요양원 들어가시고 돌아가신 세월부터 제가 와이프 생일을 위해 미역국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세월이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사실 햇수만 많았지 횟수로는 열 번 정도밖에 안 됩니다. 1년에 한 번 하면서 생색낸다고 힐난을 하시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자랑이 아닌 팔불출일지 모르지만 와이프 생일과 결혼기념을 잊고 지나쳐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와이프가 저와 살아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ㅠㅠ

어제저녁은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 동네 마트에서 미역을 사고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 양지부위를 국거리로 샀습니다. 제가 만드는 미역국은 '소고기미역국'입니다. 매년 같은 미역국이라 올해는 조갯살이 들어간 미역국을 끓여볼까 하다가 그냥 하던걸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같은 소고기미역국이라도 뭔가 조금 다른 맛과 풍미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유튜브에서 미역국 끓이기 동영상도 검색해 봅니다. 재료가 소고기로 정해지니 레시피들이 대부분 비슷비슷합니다. 그냥 제가 하던 방법대로 미역국을 끓이기로 합니다. 다만 백종원 선생께서 소고기랑 미역을 볶을 때 액젓을 넣어 간이 배게 한 다음에 물을 붓고 끓여보라는 한마디를 참고하여 따라 해 봅니다. 소고기와 미역에 간이 배서 감칠맛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역시 전문가의 입맛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그렇게 미역국에 국간장과 간 마늘을 넣고 양념을 맞추고 한소끔 더 끓여놓습니다. 생일상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침 출근시간이 서로 달라, 제가 먼저 출근합니다. 출근길에 생일 축하 문자와 함께 끓여놓은 미역국 먹고 출근하라고 카톡문자를 보냅니다. 오늘 저녁 외식은 막내 녀석이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사겠답니다. 아이들이 큰 이후에는 경제적 지출이 분할되는 듯하여 나름 뿌듯하기도 합니다.


퇴근길에 베이커리에 들러 작은 생일 케이크 하나 사들고 갈 요량입니다. 저녁 외식을 하고 집에 와서 촛불을 밝히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몰래 준비한 목걸이도 내밀어 전해줄 겁니다. 그래야 다음 생일 때까지 무사히 한 해를 살아낼 수 있을 겁니다.


와이프 생일을 챙기는 일은 1년짜리 안심 보험을 드는 일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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