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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05. 2020

시간의 사유를 가능케 한 현충일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만 6월에 접어들었다고 한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5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호국영령을 추모할 현충일이자 주말입니다.


시간을 구획 지어 놓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편리성을 위한 것이지만 인간의 족쇄가 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순환의 주기를 정확히 파악하여 미세 단위의 시간까지 금을 그어놓게 된 인간의 영악함이 그 함정에 빠진 결과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제외하고 시간에 얶매어 사는 존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글귀처럼 시간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그 시간을 즐겨야 합니다. 한 시간이면 한 시간, 하루면 하루, 1년이면 1년, 그리고 한 세대면 한 세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만큼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야 합니다. 부여된 의미는 각자의 몫입니다. 하루를 1년같이 살 수도 있겠고 1년을 하루같이 살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이 아침에도 그 시간의 초시계가 움직이는 흐름을 살펴봅니다. 어떠한 의미의 시간으로 오늘 하루를 채워나갈 것인지 그리고 그 쌓인 나날이 어떤 의미로 남게 될지 말입니다. 지나고 나면 남는 것 하나 없는 상태, 그것이 잘 산 것일 수 있을 테고 무언가 남았다고 한다면 그 또한 남긴 것으로 잘 살았다고 자평하면 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점에도 신경을 쓸 여유가 있고 코끝에 전해오는 꽃향기에 발길을 따라갈 집중도 있어야 합니다. 지켜보는 관조의 시간이 곧 내재된 생명력을 하나씩 돋아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껴지는 것은 "살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죽을 날이 가까이 있으니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에 잠도 줄어들고 한다"는 괘변입니다. 시간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가져다 붙이기 전에 시간은 이미 각자의 시간이라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벽에 붙은 시계의 숫자는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그 숫자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속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렇다고 속도의 차이로 인해 확연히 시간의 차이를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 도 없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관념적인 차이가 아닌지 하는 혼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시각에서 시간을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니까 인간의 시각으로 시간을 봐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서 그 미묘한 차이를 인식치 못하는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묘한 차이라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며 아예 인식치 않는 게 옳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구를 벗어나 달을 가고 태양계 너머로 우주선을 보내는 일처럼 시선의 높이를 넓히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시간의 오차 100분의 1초 차이로 인하여 우주선 도킹이 안되고 궤도를 벗어나고 합니다.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행성이 시속 7만 km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은하계 중심을 공전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합니다. 또한 둥근 지구 표면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왜 우주 밖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는지 조차 인지하지 못합니다. 지구 중력에 의해 휘어진 곡률은 지구 반지름의 1/27,000만큼 휘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의 T맵과 같은 네비게이터가 이 휘어진 오차를 조정하여 좌표를 잡고 있습니다. 매일 매시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적용된 GPS 통해 시간을 맞추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천재는 똑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범인들은 시간이 같이 움직이고 같이 변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에 당연하게 느끼고 느낌을 떠나 본래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인지의 한계 너머 있는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시간과 속도를 현실로 끌고 와 보아도 삶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천지자연의 순환적 반복을 시간이라는 용어로 숫자화하여 굴레를 만들고 그 굴레를 철저히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하는데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천재들의 관찰력과 직관 덕분에 우주의 작동 원리와 시간의 상대성을 알게 되고 오감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절감합니다. 극소수의 천재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가 현재 지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간의 관찰자 후예답게 우리는 6월의 어느 한날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간이 어떤 날이든, 6월이면 어떻고 10월이면 어떻고 아니 숫자가 아닌 '푸르른 날'이라고 부르던 아무 상관없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하고 공유한다는 것이 인간 공동체의 핵심입니다. 공유되지 않으면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같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시간은 이렇게 철저히 공감과 공유의 의미로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불금입니다. 내일이 현충일인지라 우리의 현재 시간을 있게 해 주신 호국영령들께 감사의 마음을 갖고 지내야겠습니다. 시간의 사유조차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없었을 사치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들여다보면 시간 속에 소중함이 담겨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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