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un 08. 2020

기록과 기억의 재구성

보이지 않으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보인다는 것이 단지 사람의 시선이 인지하는 범위라고 정의한다면 시선 밖의 세상은 없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시선의 경계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한계라는 것이며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이 범위의 개념은 우주론에서는 '사건의 지평선'이며 철학에서는 사유의 한계로 표현됩니다. 증명되고 검증되는 것을 확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수학이라는 상징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숫자로 표현하여 증명을 해냅니다. 놀라운 능력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보이게 하는 개벽 천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미 검증된 수식을 통해 새로운 수식을 만들어내고 또한 미지의 세계를 수식으로 풀어 보여줍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에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영역으로 끌어와야 합니다. 시선과 사유의 폭은 그래서 넓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감수성을 키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의 주장처럼 감수성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자연 발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감을 세우고 스치는 바람결을 깨닫고 들리는 새소리의 지저귐까지도 잡아내 예민하게 감수성을 깨워내야겠습니다.


이 감수성의 발현도 기억의 강을 건너와야 함은 당연합니다. 또한 기억의 단초는 연관성입니다. 기억과 연관성을 넘어서야 창조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에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바로 기록입니다. 기억의 또 다른 형태가 기록이고 브레인을 넘어선 외부 저장고입니다. 기록은 기억을 현재로 끌어오는 발화점입니다. 기록이 없는 기억은 '기억의 현재 재구성'에 있어 스토리를 지어내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기록이 있는 기억은 재구성시 당시 상황을 거의 그대로 재현해 낸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기억을 왜곡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록의 장점입니다.


무언가 기록해놓는다는 것이 이렇게 다릅니다. 굳이 기록이라고까지 표현하지 않아도 무언가 끄적거려 놓기만 해도 됩니다. 인간은 잊어버리는 존재이기에, 아니 모든 걸 기억하면 안 되는 존재이기에 필요한 것은 기억 속에 각인시키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잊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잊혀가는 많은 것들 속에서 작은 단서만 주어도 활화산처럼 기억을 되살리는 마법 같은 존재가 또한 인간입니다. 일명 잠재의식입니다. 과거에 지나간 것들은 신경세포 어딘가를 분명히 지나쳐 갔기에 어떤 계기만 주면 데자뷔처럼 재생을 합니다. 놀라운 인간의 능력입니다.

지나간 시간 속에는 좋아했던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 모든 존재의식이 혼돈되어 새겨졌다 서서히 지워져 갑니다. 좋은 것은 좋은데로 기억되는데 안 좋았던 것들도 망각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좋은 것으로 환생을 합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을 좋은 것으로 승화시키는 정화의 능력 때문입니다. 바로 진화의 산물입니다. 안 좋은 것을 계속 기억하고 되새겨봐야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간혹 트라우마가 되어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기도 합니다만 말입니다.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안 좋은 상황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정말 강렬한 몇몇만이 트라우마로 생존해 있음을 발견합니다. 몇몇을 제외한 수많았던 안 좋은 기억은 이미 사라져 존재의 의미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시간 속에서 순화시켜지고 환치되어 어떤 시점이 되면 모든 것이 동일시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말입니다. 바로 '기억의 재구성'입니다. 물론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의 사건으로 기억되거나 감정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왔던 사례들은 그 자체로 각인됩니다. 하지만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을 모든 것들은 자신에게 긍정적인 도움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최면을 걸게 됩니다. 대부분의 과거와 추억들이 예쁘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단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 과거의 삶보다 어떤 형태로든 좋거나 나은 상황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과거와 비교해 현재의 삶이 힘들다고 생각되면 과거의 추억과 기억은 나쁜 쪽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 당시에 그래서 나의 지금이 이 모양이야"라고 자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좋다고 생각되면 힘들었던 과거는 현재의 상황을 만들기 위한 시련의 기회였다고 환치를 합니다. 확증편향에 사는 인간들의 전형입니다.


아니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확증편향의 방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힘이 결국은 가치관이 되고 삶의 방향이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 자연과학이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음을 까밝혀놓고 있음에도 우리는 '불편한 진실'보다는 '안심시키는 거짓'을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결정이자 선택이라고 자위하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볼 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시간의 사유를 가능케 한 현충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