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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09. 2024

생각의 틀에 의문을 던져보자

인간을 규정하는 기본 단위는 '생각'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 가장 연약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설파한 문구는 인간 존재를 규명하는 대표적 문구로 각인되어 있을 정도다.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생명체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단계로까지는 진화하지 못했다.


생각(thought)은 "어떤 관념에 도달하기 위한 의식적인 정신적 과정을 말하며 헤아리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것 따위의 정신작용"으로 사유(思維), 사고(思考)라고도 한다. 생각의 기본 동력은 헤아린다는데 있다. 헤아린다는 것은 대상을 묻는 것이고 비교한다는 것이다. 바로 대상을 규정한 언어로 인하여, 생각은 폭발적인 확장성을 갖게 됐고 인간 본성과 본질을 만들게 됐다.


그래서 생각은 지리적, 문화적 조건에 따라 지구표층의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너무 다르기에 효율성을 위해 틀을 만들고 나누기 시작한다. '생각의 틀'이다. 틀을 짜놓고 들어가면 편안해진다. 수많은 다른 변수로 인하여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오직 그 틀 안에서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틀이 정치로 가면 우파와 좌파로 나누어지고,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며, 사회로 들어오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구획 짓기도 한다. 관념의 종교로 가면 더욱 극명해진다. 가톨릭, 개신교, 불교, 이슬람교, 기타 민족종교 등 그 틀은 더욱 정교해진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들먹이기도 하고 학연과 지연과 혈연까지 끌어들여 자기만의 영역과 리그를 만들어 나간다. 생각의 틀이 행동의 틀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현장이다. 호모사피엔스들은 이렇게 틀을 짜는 게 생존에 유리함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세계를 구획 지어 놓은 동양과 서양의 시각과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눈치채게 해 준다.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은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인은 세상을 '관계'로 파악하고 서양인은 범주로 묶일 수 있는 '사물'로 파악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는 언어의 문화 차이가 일정한 역할을 한다"라고 간파하고 있다. 같은 동양을 분류하지만 한국사람과 일본사람, 중국사람이 생각하는 틀, 또한 확연히 다르다.

일본사람은 두 개의 생각 범주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바로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다. '혼네'는 말 그대로 본마음이다. 자신만 알고 가족, 친구에게조차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예의 바르고 깍듯하며 질서를 잘 지키는 대인관계용 겉모습이 '다테마에'다. 그러다 보니 일본사람은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가족처럼 허물까지 드러내고 알아야 친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사실 민족성에 대한 이러한 구분조차 '생각의 틀'이라는 범주에 집어넣고 흔들어 획일화된 관점을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여 민족이 구성되고 국가가 만들어져 있는데 어떤 한 단어로 그 혼합을 규정하여 단정 짓는다는 것이 우스울 수 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틀을 만들어 구획 짓는 일은 본능에 가깝다. 범주를 만들고 규정지어 놓아야 인식의 범위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름 붙여놓아야 그때서야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의 틀을 깬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렌즈를 갈아 끼우는 행위다.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도 바뀐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틀을 확장할 수 있다. 틀을 좁히고 막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할지 모르지만 틀에 갇히면 획일화되고 단편적이 되어 확장성을 잃게 된다. 길고 멀리 보면 오히려 생존에 불리하게 된다. 세상은 부감의 시선으로 내려다봤을 때 나무도 보이고 숲도 보이고 더 멀리 건너편 호수도 보이고 바다와 하늘의 끝도 볼 수 있게 된다. 내 생각의 틀을 옥죄고 있는 시선과 관점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게 편할 수 도 있겠지만 그렇게 살면 세상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생각의 틀을 조금씩 확장해 나가는 재미를 알게 되면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도전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삶이란 어차피, 없는 것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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