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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10. 2024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묻고 답하라

산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끝없는 질문을 하며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생명들에게 가장 확실한 진리는 오직 하나다. 언제가 죽는다는 것이다. 생명을 가졌다는 모든 물질에게 반드시 닥쳐올 시간이자 문제다. 죽는다는 사실 이외의 것들은 그냥 기타 등등 주변 변죽 일뿐이고 주어진 시간의 범위 내에서 지지고 볶고 노는 허상일 뿐이다. 우주의 시간 148억 년, 지구역사 46억 년이 지나는 동안 한치도 벗어날 없는 현장이고 숙명이다. 너무나 명백하기에 도피처를 마련한 것이 종교다.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아무도 적이 없지만 있을 거라 믿고 따르면 편안해진다. 그래서 종교는 호모사피엔스의 정교한 진화 과정에서 최정점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개인으로 들어오면 이 장구한 시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단지 100년의 시간만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생명으로 불리는 순간부터, 제한된 시간에 대한 카운트가 시작되었고 이미 상당 시간을 지난 경과 속에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이 반드시 오지만, 자연으로 돌아갈 그 시간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기에 현실로 받아들이기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올 것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고자 마치 안 죽을 듯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 가득히 살아내고 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고 끝없이 묻고 답해야 하는 이유다.


묻지 않으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묻는다는 것은 행위에 평가를 하는 것이다. 모든 물음의 시작이다. 자기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타인, 사물에 대한 궁금증의 물음까지 모두 포함된다. 묻지 않으면 습관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묻는다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 좌표를 확인하는 일이다. 가볍게는 나는 지금 몇 살이고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음을 시작하면서 나의 위치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 묻는 방법을 몰라서, 무엇을 물을지 몰라서 못 묻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답해봐야 한다.

'안다'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어떤 사실이나 정보, 공부한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두 펼쳐놓고 확인하고 평가해봐야 한다. 시험문제 풀듯 사지선다형으로 맞춰보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 지식이 체계적으로 쌓여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일반상식을 많이 안다고 똑똑한 것이 아니다. 결정적 물음에 답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질문의 깊이는 결정적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달려있다. 많이 아는 듯한데 설명을 하라면 머뭇거린다. 단어 몇 마디, 한 문장으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아는 게 아는 게 아니다.


날씨 중계하듯 읊조리는 수준이 되어서는 안다고 할 수 없다. 날씨 중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구름 끼고 바람 불면 비가 몰려올 것을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바깥바람이 차게 느껴지면 영하의 기온이라는 것도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날씨의 현상을 이야기하는 기상캐스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바람과 구름의 방향, 구름층의 두께와 지형의 영향까지 질문을 던져야 정확한 예보를 할 수 있다. 현상은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분석은 천차만별로 나올 수 있고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질문을 어떻게 던지느냐가 중요해진다.


질문의 시작은 끊임없이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물음이 존재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듯이, 내가 지금 마주한 상황의 원점에서 주위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다. 그래야 질문이 떠오른다.


문제해결의 단초는 항상 시작점에 있다. 너무도 당연하다. 너무 당연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기에 발생하는 오류와 편견을 낳고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원점에서 다시 보아야 창의성이 발현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접근이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미쳐 못 보았던 것을 다시 볼 수 있는 능력이 창의성이다.


나는 지금 나에게 무엇을 물을 것인가? 존재의 이유를 물을 것인가? 점심때 무얼 먹을까 물을 것인가? 아니면 불금인데 저녁에 누구랑 뭐 하며 놀까를 물을 것인가? 무엇이 되었든 물어야 행위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바로 지금을 이어 다음 순간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하는 방향의 지표가 바로 질문이자 물음이다. 그래서 질문을 잘하고 잘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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