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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22. 2024

딸을 시집보낸 다음날, 아빠의 마음

지난 일요일, 큰 딸아이가 결혼식을 치르고 월요일,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어제 새벽, 로마에 잘 도착해서 차를 렌트하고 본격적인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다고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10여 년 전 가족여행으로 열흘간 밀라노로 들어가 베네치아, 제노바, 친퀘테레, 로마, 바티칸, 피렌체, 피사를 거쳐 남부의 폼페이, 나폴리, 포지타노, 아말피를 지나 살레르노에서 나오는 코스를 갔던 적이 있었던지라, 딸아이 부부의 이번 신행 루트는 이탈리아 서부해안을 끼고 시칠리아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남부를 돌아 동해를 끼고 계속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돌로미티로 가는 코스를 잡았답니다. 15일간의 신혼여행은 삶의 화양연화임이 틀림없습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한때일 겁니다.


사실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돈 쓸 때가 아닌가 합니다. 신혼여행이 그 행복의 전형일 겁니다. 사람 나름이겠지만 그래도 인생에서 돈에 구애 없이 가장 펑펑 지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테니 말입니다. 너무 물욕적이고 세속적이긴 하지만 돈이란 그런 것이고 행복이란 그렇게도 따라오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설하고, 딸아이 결혼식 끝나고 3일째입니다. 지난 이틀 동안 부처님 오신 날 연휴 마지막 날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장을 찾아 축하해 주신 많은 분들과 사정상 오시지 못하고 마음을 전하신 분들께 일일이 전화통화를 해서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틀을 통화해도 아직 다 연결하지 못하고 있어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으나 찾아뵙고 인사드릴 예정입니다.


감사인사 통화 중에 많은 분들께서 "딸 시집보내고 나니 심정이 어떠냐?"라고 물으십니다. "담담해?" "울었지?" "허전해?" "섭섭해?"등등 심정까지도 미리 상정해 물어보십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지금 그냥 무덤덤합니다. "뭐 이런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 다 있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몇 달을 마음을 다스리고 최면을 걸고 심호흡을 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감정도 기술입니다. 감정은 단어와 개념의 옷을 입고 있기에 눈물의 단어와 기억을 배제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결혼식날 눈물을 보이거나 울컥하는 심정을 자제시키기 위한 노력말입니다. 감정이 억누른다고 눌러지는 게 아닐 수 도 있지만 단어와 개념의 회피만으로도 잠시의 감정은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쓴 전술 중 하나가 축사와 덕담을 할 때 다른 행위로 대체하는 거였습니다. 축사는 써서 서면으로 줬습니다. 어차피 신랑 신부 세워놓고 온갖 좋은 말을 전해도 들리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고 있는지라, 그럼 축사를 읽는 대신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하객들에게 신랑 신부를 다시 소개하는 것으로 축사 시간을 대신했습니다. 결혼식 손님은 부모 손님이고 장례식 손님은 자식들 손님이라고 했습니다. 막상 하객으로 가면 신랑 신부 나이가 몇인지, 직업은 뭔지, 어디 다니는지 궁금하지만 당사자에게 묻기도 뭐 하고 그냥 설렁설렁 예식장을 다녀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신랑 신부를 하객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겠다고는 신랑신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변형으로 하는 진행이라 못하게 할지도 모르겠기에 제가 속으로 구상만 하고 있다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했습니다. 이 전략은 나름 성공했습니다. 횡설수설하기는 했습니다만 신부 아버지가 감정을 못 삼키고 울먹거리고 눈물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신부아버지가 살짝 울음을 삼키는 모습도 괜찮다고 추천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너무 웃고 하면 신부가 "나를 쫓아내서 아빠가 기분이 좋으신 건가?" 섭섭하게 볼 수 도 있다는 충고입니다만 저는 눈물보다는 웃음이 더 좋습니다.


딸아이가 떠난 방은 애 엄마가 차지하고 들어갔습니다. 딸아이 방이라 아빠가 쓰는 것보다는 엄마가 쓰는 게 더 맞을 것 같기에 가만 놔두었습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각 방을 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부부가 안방에서 계속 같이 잔다고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 들면 들수록 잠잘 때 옆에 누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가끔 코 고느라 수면 무호흡 상태가 되더라도 뺨따귀 때려 호흡을 돌려줄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일 겁니다. 그래도 와이프는 무심히 딸아이 방으로 자러 들어갑니다. 혼자 자는 맛을 이틀 만에 익힌 듯합니다. 딸아이 결혼하고 후속으로 이어지는 집안의 사용 영역 쉬프트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딸아이 결혼하기 2주일 전인가요? 신혼집 정리하느라 며칠째 집에 안 들어오다가 집으로 온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와이프 반응이 너무도 생경했고 그때서야 딸아이가 결혼하는가 보다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딸이 집에 온데, 청소해야지!"였습니다.

딸이 손님으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막내 녀석이 한 마디 합니다. "누나가 손님이야? 뭔 청소야? 누나 오면 청소하라고 해"


그렇게 역할이 다른 위치로 각자의 포지셔닝을 하고 있습니다. 무덤덤해지고자 최면을 걸고 "감정도 기술이다"를 반복하며 되뇌는 이유가 바로 바뀌는 포지셔닝에 대한 위로가 필요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신부 아버지가 속으로 울컥하게 올라오는 그 무언가를 억눌러 잡고 있는 모습일 겁니다.


사실 결혼은 새로운 식구 한 명 더 늘리는 가족의 경사입니다. 행복하다. 잘됐다. 든든하다로 단어를 대체하면 신부 아버지의 억누른 눈물은 밖으로 나올 틈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딸아이를 결혼시키고 신혼여행을 보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10년을 만나며 지겨울 만도 한데 결혼까지 했으니 천상 커플일 겁니다. 예쁘게 잘 살 것이 틀림없습니다. 많은 축복을 전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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