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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May 29. 2024

한계 지워져 있다

한계(限界 ; limitations), '힘이나 책임, 능력 따위가 다다를 수 있는 범위'를 말한다. 무한과 유한을 경계 짓는 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계의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존재를 규정하기도 한다. 대륙과 대양을 구분 짓는 해안선의 끝자락은 바다의 한계이자 땅의 한계다. 생명 세포의 안쪽과 바깥쪽의 한계가 개별 존재와 자연의 구분이 되기도 한다.


한계는 구분 짓고 경계 짓는 상한선이고 하한선이지만 물러날 수 있는 뒷모습보다 미래의 모습에 형상을 입히는 과정이다. 선을 그어야 비로소 존재와 대상으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계는 실존의 형상을 만드는 윤곽선이다. 실존을 범주화해서 개념을 만들고 의식으로 끌어들이는 두레박 같은 것이다.


이 아침, 하늘에 두 개의 항성과 행성이 동시에 보인다. 태양과 달이다. 태양은 아직 온전히 열기를 드러내지 않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이고 달은 서쪽 하늘 위에 하얗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낮과 밤의 한계가 중첩되는 현상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어 있다. 자연의 상상력은 인간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저 감탄할 뿐이다. 문득 청푸른 하늘의 색깔 너머엔 암흑의 검은색이 펼쳐져 있음에도 그 본질을 보지 못하는 한계가 빛과 대기의 산란(散亂 ; scattering) 관계에 숨어있음을 눈치챈다. 푸른 하늘에 열광하느라 푸름 뒤의 검음의 경계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의 본질은 푸른색이 아니고 그 너머의 검은색임에도 말이다.


한계 지워져 있다는 것은 불안하기도 하고 평안을 주기도 한다.

'생명이 유한하다'라는 만고의 진리는 시곗바늘이 몇 번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느냐는 숫자의 한계를 말한다. 생명마다 시간차이가 있으나 오십 보 백보다. 오래 살기 위해, 건강하기 위해 매일 죽어라 운동해 보라, 얼마나 더 살 수 있고 얼마나 더 건강해질 수 있는가? 몇 달? 아니 몇 년? 그렇게 남들보다 몇 달 몇 년 더 살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운동과 건강의 한계를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죽어라고 운동하다 일주일만 운동 루틴을 빼먹어보라. 근력이 떨어졌음을 바로 눈치챌 수 있다. 딱 한 달이다. 운동하고 안하고의 근력 시간차가 말이다. 그래서 항상성이 중요한 것이다. 운동은 하다 말다 하는 것이 아니고 꾸준히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움직여야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동물의 근본이다. 인간 신체는 에너지를 무한으로 저장할 수 없고 근력을 터미네이터처럼 막대하게 쓸 수 없다. 지속적으로 보충하고 유지시켜 주어야 겨우 버틸 수 있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 몸이다. 바로 인체의 한계다.


이 유한의 한계를 불안으로 생각할 수 도 있고 평안의 호수로 받아들일 수 도 있다. '나'를 규정하고 있는 한계가 무엇인지 하나씩 들여다보고 들춰내볼 일이다. 그래야 그 한계에 맞춰서 부족한 것은 채우는 작업을 하고 남는 것은 덜어내는 일을 할 수 있다.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나인데 같지 않아야 하고, 둘인데 다르지 않아야 한다"라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자 한계이기에 그렇다. 생명은 조건별로 상태를 바꾸는 현상이다. 외부의 우연을 내부의 필연으로 바꾸는 것을 생명이라 한다. 외부 자연은 우연이다. 우연은 확률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컴퓨터 모니터 한 귀퉁이 써서 붙여놓은 정현종 시인의 '나 세상 떠날 때'라는 시가 눈에 들어온다. 한계 지워져 있음을 미리 간파한 시인의 어깨너머로 훔쳐보자.


"세상 떠날 때 나는 내 뒤에 태양을 남겨놓으리

  그 무슨 말 무더기

  무슨 이름

  그 무슨 기념관 같은 거 말고 태양을 남겨놓으리

  그러니

  해가 뜨거나 중천에 있거나 하늘이 석양으로 숨 넘어가며 질 때

  그게 내가 남겨놓은 것이라고 기억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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