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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03. 2024

이름 붙이기-유재(留齋)와 케렌시아(Querencia)

추사 김정희의 글씨중에 유명한 것들이 많지만 그중에 나는 유재(留齋)라는 작품이 좋다. 유재 현판은 예서로 쓴 두 글자와 행서로 풀이글을 쓴 흘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대적 캘리그래피로 봐도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천재적 손길은 시대를 초월한다.


유재는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조참판 남병길(1820-1869)의 호로 알려져 있지만 남병길은 육일재(六一齋)와 혜천(惠泉) 두 개를 호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남병길이 거처하는 집에 대한 당호로 써주었을 가능성이 더 큰 듯하다. 김정희가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쓴 것이라는데 왜 썼는지에 대한 사연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김정희가 이어서 쓴 풀이글을 보건대, 관직에 있는 제자에게 당부하고 경계하라는 조언이 아닐까 한다.


유재는 머무를 유(留), 집 재(齋)를 쓴다. 재라는 글자에 대한 주석이 다를 수 있으나 재계할 재 자로 해석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머무는 곳'이라고 볼 수 도 있고 단순히 집으로 해석하여 '머무는 곳'이라 할 수 도 있으며 머무를 유 자를 '남겨둔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남김을 두는 집'이라고 할 수 도 있다. 제자가 살고 있는 집의 현판으로 써주었으니 은유와 당부가 함께 담겨있는 중의어일 가능성이 큰데, 같이 쓰인 주석 글이 압권이다.


유부진지교이환조화(留不盡之巧以還造化) 유부진지녹이환조정(留不盡之祿以還朝廷) 유부진지재이환백성(留不盡之財以還百姓) 유부진지복이환자손(留不盡之福以還子孫)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기어 조화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기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기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기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욕심보다는 여백의 미를 강조하여 여유를 유지하라는 권고다. 권세를 이용해 재물을 탐하는 관리로서의 자세를 경계하라는 충고다. 절제를 통해 후대에게 그 선한 영향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라는 미래지향적 조언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세상사는 지혜의 전달이 아닐 수 없다. 권력에서 쫓겨나 유배생활을 하는 사람이 전할 수 있는 처절한 생존기법의 전수는 아닐까? 현대의 관료들도 새겨들어야 할 경계이자 할(㿣)이다.


한편 집으로서의 유재는 케렌시아(querencia)라 할 수 다. 나만의 피난처이자 안식처다. 케렌시아는 스페인어로 '투우장에서 소가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장소'라는 뜻인데,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재와 케렌시아는 동급이다.


단어 하나를 가슴에 머금고 있으면 그 의미가 새싹 돋듯 스멀스멀 올라온다. 기분을 지배하고 감정을 지배하고 의식을 지배한다. 단어란 그런 것이다. 일찍이 이를 간파한 선조들은 집의 현관에 써서 붙이고 나무를 파서 각인을 해놓고 항상 경계를 했다. 머릿속에 주문처럼 외울 수 있게 항상 눈에 띄게 한 것이다. 이름 붙인다는 것은 추상을 형상으로 만드는 일이고 존재에 의미를 입히는 일이다. 그때서야 살아 움직이는 행동이 된다. 그래서 유재와 케렌시아는 나만의 비밀공간이자 아지트다.


나만의 유재와 케렌시아 한 곳쯤은 숨겨두고 있을 일이다. 어떠한 공간이 되었든 말이다. 풍경소리 들리는 숲 속의 산사일 수 도 있고 바다내음 밀려오는 자갈밭 파도소리가 숨어있는 섬일 수 도 있고, 멀리 옅은 안개에 싸인 도심의 소음이 차단된 전망 좋은 카페의 창가 자리일 수 도 있다. 그 속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그래서 남겨 놓을 여유가 생기는 곳, 그런 곳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일이다. 그 안에서 반겨줄 사람이 있다면 금상첨화일터이다. 그렇게 이름 붙이고 가슴 설레고 찾아가 볼 일이다. 저 작렬하는 태양을 주춤하게 만드는 그늘 같은 곳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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