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un 05. 2024

정년퇴직 앞둔 시한부 직장인

시한부(時限附).


"어떤 일에 일정한 시간의 한계를 둔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시간 끝에 따라붙는 용어로 많이 쓰이다 보니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단어다. "무슨 무슨 암으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라는 표현을 써서 살아 낼 수 있는 시간의 끝을 한정 짓는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사실 생명의 시간과 연결되어 많이 쓰여서 그렇지, 시간을 한정하는 여러 상황에서도 종종 사용된다. 끝이 정해져 있는 상황과 사건들의 연속이 삶의 모습이다. 시간에 선을 그어놓고 거기까지라고 단정 지어 놓은 것이 시계판의 숫자이고 삶은 그 시한부 숫자를 매 순간 넘어가는 현상일 뿐이며, 사업의 프로젝트가 세워지면 반드시 타임라인을 만들게 되는데 역시 시한부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진 감정이 따라오기에 거기에 매몰될 뿐이다. 그래서 '시한부'는 눈물 흘리고 한숨 쉬는 상황이 되기도 하고, 성공을 위해 긴장하고 준비하는 용기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나도 시한부다.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할 날이 가시권 안에 들어온 시한부 직장인이다. 올해 환갑이 도래하는 64년생 동갑내기들이 올해 모두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를 한다. 임원으로 남아 1년씩 연장하며 다니던 직장에서 계속 연장해 있기로 결정한 사람도 있고 이미 생일달이 지나 은퇴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생일달이 오지 않아 퇴직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그 뒷 차의 시한부 대상이다. 10월이 생일달이니 이번달을 포함해 딱 5개월 시한부 직장생활이 남았다.


이 시한부라는 용어에 꽂힌 것은 지난달 지인의 상갓집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의 한 마디 때문이다. 조문을 하고 해장국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앉았는데 옆에 있던 동창이 "직장 생활 얼마 안 남겨놓은 시한부로 사니까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을 받기까지 한 번도 '시한부 직장생활'이라는 단어의 연결성을 이어 보지 않았다. 이 '시한부'라는 말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 그래 내가 뭐 하고 있었지? 직장생활은 어땠지? 정리할 때가 되었는데 어떻게 준비하고 있지? 퇴직 후 계획은 있기나 한 건가? 등등 '시한부'가 갖고 있는 시간의 한계가 엄습하듯 들이닥쳤다.

어렴풋이 퇴직할 날의 마지막 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여러 차례 그려보긴 했지만 마치 오지 않을 일처럼 잠시 잠깐의 외면으로 무시해 버렸다. 그러다 문득 '시한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세상의 모습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의 직장생활시간만이 남아있는데 군대 전역날짜 받아놓고 달력에 X표시해 가며 하루하루를 지워나가는 설렘과 기대감이 치솟아 올랐다. 오늘 아침은, 어제까지 시한부 삶을 살았던 사람이 그렇게 간절히 보고 싶어 한 날의 시작이다. 그런 날 아침 나는 눈을 떴으니 오늘 하루는 나에게 천국의 시간이다. 순간순간을 허투루 허비할 수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푸르름이 이렇게 빛날 수 있으며 간혹 흐리고 비가 스쳐가면 그 또한 얼마나 신비로운 현상인지 절절히 다가온다. 보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에도 부족한 시간일 듯싶다. 맛난 것 먹을 멋진 장소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사소한 일상, 예전에 동행했던 시골 기차역의 플랫폼 모습을 같이 회상하며 웃을 일이다. 지금 살아있음에 대한 최대한의 즐거움과 기적을 마주할 일이다.


시한부를 너무 의기소침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 안에서 콤팩트하게 집중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집중하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된다. 안 느껴지던 것이 느껴지고 맛없던 것조차 기억의 저 편을 깨워 향연에 동참시킨다.


시한부 직장생활은 사실 한 場이 끝날뿐이다. 또 다른 場으로 옮겨가면 된다. 마치 정년퇴직이 시한부 인생이라도 되는 듯이 침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퇴직을 앞둔 사람들이 침울한 것은 場과 業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은 계속 바뀔 수 있고 옮겨갈 수 있다. 직업은 내가 평생 해온 것이기에 바뀔 수 도 없고 버릴 수 도 없다. 직업은 계속 이어서 하면 된다.


그래서 시한부는 받아들임을 전제로 해야 긍정의 시선으로 전환할 수 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지난 행적을 뒤돌아볼 수 있는 감상을 주고, 그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암시를 준다. 순간순간이 경이이고 시간 시간이 행복이고 사랑임을 알게 된다. 시한부는 유한이 주는 자연의 서사시에 감사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다. 고마워해야 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키워드에 올인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