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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26. 2024

빠르면 느릴 수 있지만 느리면 빠를 수 없다

살면서 속도조절은 필수다. 느려서도 안되고 빨라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그 중간 어디의 적당한 속도를 정하기도 애매하다. 속도의 대상이 무어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속도 조절은 뭔가? 상대적 자기 속도라는 것이다. 나만이 알고 있다. 그래서 느리게 걷기도 하고 빨리 달리기도 하고 걷고 달리고를 섞어서 융합하기도 한다. 밥 먹는 식사 시간의 속도도 그렇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속도도 그렇고 연예할 때 진척 속도를 조절하는 지혜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것을 선제적 속도조절이라고 한다.


속도조절. 쉬운 것 같지만 어렵고 어려운 듯 하지만 쉽기도 하다. 느린 것 같으면 빨리 하면 되고 빠른 듯싶으면 천천히 하면 된다. 이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이 속도조절이 쉬우려면 속도에 대한 기준이 서있어야 한다. 고속도로의 속도제한처럼 말이다. 크루즈 정속주행을 걸어놓으면 차가 알아서 가는 것과 같다. 요즘 차량은 더 진화하여 정속주행을 넘어 앞차의 운행상황에 맞춰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속도를 조절한다. 인간이 감으로 하는 속도조절을 자동차는 숫자 알고리즘으로 간단히 해결해 버린다.


인간의 감각으로 속도를 맞추는 것은 정교한 근육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엑셀레이터를 밟는 오른발 근육에 적당한 힘을 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각 이미지로 들어오는 계기판의 속도 숫자와 다리 근육의 미세한 힘조절이 맞아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운전이라는 것이 70-80대 어르신을 비롯하여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자동차 운전은 근육의 힘을 통제하여 속도조절을 해야하는 정교한 운동이다. 가끔 노년의 어르신들이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를 혼동하여 밟아서 사고를 일으키는 사례를 보게 된다. 나이 들어 공간 지각 감각이 느슨해지고 시력도 떨어져 거리 판단도 줄어들고 근력도 줄어들면 당연히 돌발 반응도 느려진다. 나이 70세가 넘어가면 운전면허증 갱신할 때 신체 반응 검사를 철저히 한 후에 교부하는 것이 맞다. 지금도 70세 이상 고령자 운전면허 갱신 시에는 시력, 청력 검사, 반응속도와 운전 인지 능력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면허 갱신주기가 10년이다. 노령자들은 이 갱신주기를 짧게 1-2년으로 단축하는 게 맞다. 노년기 건강은 밤새 안녕이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노인비하가 아니고 운전자 본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해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속도가 도로를 떠나 삶의 시간으로 들어오면 다른 개념으로 치환을 한다. 삶의 시간에서 속도는 느린 것보다는 빠른 것이 더 유리하다. "빠르면 느릴 수 있지만 느리면 빠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빨리빨리의 속도 본능이 한국인의 대표 심성으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든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벌인 무한속도 가속이었다. 경제 속도전에서 성공한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 빨리 달리느라 주변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따라잡고 보니 이제야 빨리 달려오느라 놓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속도조절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하지만 이 속도조절이 내부적 자각으로 일어나야 하는데 외부적 견제로 발생하고 있어 충돌이 일어난다. 각자의 속도가 다르기에 같이 조율하여 맞추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빨리 달려봤기에 천천히 걸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도 아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바로 조율과 배려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잡아 주어야 하고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어차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혼자만 빨리 달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1등을 해서 기분 좋을 수 있겠지만 너무 달려 주변에 아무도 없는 1등은 자족하는데 그치고 만다. 1등을 축하해 줄 타인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각자의 방향으로 뛰어 모두가 1등이 되게 하고 그 성과를 칭찬하고 보듬어가야 속도 제어를 할 수 있다.


세상의 속도는, 혼자 있을 때는 별 의미가 없다. 같이 있을 때 그 속도의 진가가 숫자 속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속도를 조금 조절하면, 빨리 가서 놓치는 것들을 잡을 수 있다. 떠가는 구름도 잡아 눈에 넣을 수 있고 보도블록 사이에 피어있는 잡초의 꽃에서도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등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말려주는 이마의 땀방울조차 감지할 수 있다. 속도를 멈춰 서면 보이는 것과 달리면서 보이는 것은 천양지차다. 멈춤과 걸음, 달리는 속도의 각각의 차이가 조화롭게 섞여야 속도조절이 되고 이를 통해 삶의 시간도 조절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속도(velocity)를 속력(speed)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삶에서는 시간단위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나타내는 스칼라량의 속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방향성과 크기를 함께 가지는 벡터량인 속도가 더 필요하다. 방향성이 기준과 수준을 결정하고 시선의 방향을 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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