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다. 맥가이버처럼 만능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화되어 있다. 분업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한 가지 일만 잘해도 먹고살 수 있는 것이다.
이 한 가지를 범주화시켜 나눠 놓은 것이 직업군이다. 세상의 수많은 직업군들의 특징은 '행위'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무엇이 되었든 '하는 행위'를 가지고 직업분류를 한다. 교수는 '대학에서 연구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고 정치가는 '나라를 다스리고 국민들의 의견을 조정하여 사회를 유지 보존시키는 일을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아하는 사람'이다. 기자는 '사회현상에서 뉴스거리를 발굴하여 신문, 잡지, 방송 등 매체를 통하여 이슈로 만드는 사람'이다. 직업 이름이 곧 그 사람이 하는 행위를 대변한다.
직업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교수는 '용어와 개념을 만드는 사람'이고 철학자는 '사유를 통해 인간존재의 근원을 추론과 논리로 체계화하는 사람'이다. 있는데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과학자는 '실험과 검증을 통해 가설을 증명하고 숫자로 우주의 운행 원리를 계산해 보여주는 사람'이다. 물론 각 직업군마다 세부적인 전문분야들이 또 세밀히 나뉜다. 역시 방점은 무엇을 하느냐에 대한 행위에 찍혀 있다.
행위에 이름을 붙이면 직관적으로 알아챈다.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즉 이름을 붙여야 존재로 등장을 한다. 이름을 갖지 못하면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으니 형상이 있으되 존재가 아니다. 이름 짓기는 바로 존재로 등장시켜 나와 동등한 관계를 맺는 일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생명에 이름을 부여한다. 심지어 새로운 생명의 종이 발견될 때마다 이름을 붙이고 지난 과거의 흔적에도 이름을 붙여 각인해 놓아야 경계를 세울 수 있다. 마당에 키우는 개에게도 '순실이' '복순이'를 비롯하여 '찰스' '토마스' '곰이' '귀욤이'라고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식구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름이 곧 존재이고 존개가 곧 사랑이 되어 관심을 더 갖게 한다.
이름 붙이지 않으면 그저 타 존재와 동급인 상태로 남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나와의 특별한 관계를 이어주지 못한다.
이름 붙이기는 바로 존재와 행위의 관계 연결이다.
인간 행위에 대한 이름 붙이기는 이제 더 이상 창의적으로 만들어질 것이 없는 듯 하지만 chatGPT의 놀라운 발전으로 새로운 직업군들이 등장하고 거기에 맞는 직업 용어들이 사용되고 정착하고 있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움직임'이 생명이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생명이고 생명이라 한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불확실을 없애는 것이다. 이름을 붙여 움직임을 규정해 놓으면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행위에 대한 결과치를 예측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놀라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연을 확률로 잡아채 현상이 존재로 변환되는 과정에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은 나의 생존에 어떻게 작동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을 규정하는 근원에는 '생존'이 바탕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도 생존을 위한 '먹이'가 전부이고 종족 보존을 위한 '번식'이 그다음이다.
결국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고 그 사람의 존재 이유를 만든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잠이 덜 깼는가? 정신없이 상사에게 깨지고 있는가? 모닝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하루를 준비하는가?
어떤 행위를 하고 있던지 그 행위로 인해 '나' 라는 존재는 어떤 이름을 부여받는다. 직장인 누구누구, 사업가 누구누구, 백수 누구누구식으로 말이다. 움직이는 행위는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운명이다.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따라 다른 운명이 전개될 뿐이다.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는 자명하다. 잘 움직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