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ul 09. 2024

단 한 번의 시간, 단 한 번의 기회

물질세계에서는 물리적으로 형태가 바뀌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어쩌지 못하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으로 오면 특히나 그렇다. 생명은 직진의 방향성을 갖는다.


100년간 세상의 원자를 합성하여 태를 만들고 전기 화학적 에너지를 모아 활용하여 항상성을 유지하다가 다시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인간으로 범위를 좁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반드시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탄생과 죽음의 순간이다.


세상에 오고 싶어 온 자 없고 가고 싶어 가는 자 없다.


어쩔 수 없이, 어쩌지 못하고 왔다가 황망히 돌아가는 순간만 있을 뿐이다.


우연히 왔다, 우연히 가는 게 전부다. 삶은 이 외부적 우연을 내부적 필연으로 만들어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시간의 굴레일 뿐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반드시 있다. 유한성이다.


이 유한성이 삶의 희망을 만든다. 영원성은 존재의 귀함을 파괴할 뿐이다. 유한하기에 더욱 잘 살아야 하고 더욱더 즐거워야 하고 더욱더 행복해야 한다. 유한하기에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가치는 살아가야 하는 삶의 근원이다. 무한하면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법정스님은 이를 일기일회(一期一會)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시작의 이전과 끝의 다음은 본질이 같다. 모아서 형태로 활용하다 형태 이전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중간 형태만 다르고 바뀌었을 뿐이다. 삶의 결정적 특이점(singularity)을 건너면 존재의 태가 바뀐다. 스틱스(styx)의 강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burn bridges이고 돌아올 수 없는 경계다.


사람은 이 태가 바뀌는 경계를 넘는 것을 두려워한다. 형태가 바뀌기 때문에 당연하다. 태가 바뀌면 예측할 수 없다.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이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불안해진다. 피해 갈 수 없기에 오는 게 두려워진다. 어떻게든 이 불안을 극복해야 하기에 무한의 존재를 상정하고 매달려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 중간 형태의 모습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인지공간의 세계가 그 안에서만 펼쳐지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해석하고 맞춰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진다. 허무와 포기와는 다르다. 어쩔 수 없음의 실체를 알고 나면 그 상태에 매몰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시간, 단 한 번의 만남인데 그냥 허비할 수 없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후회하지 않는 삶으로 가꾸어야 한다. 허무와 포기는 어쩔 수 없음을 핑계로 삼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음을 스틱스의 강으로 경계를 삼는 순간, 유한이 생명 빛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게 되고 온몸의 감각을 곧추세우게 된다. 그때서야 세상이 살만한 것이구나를 알게 되고 해와 달의 스러짐과 돋움에 경탄을 하게 된다. 바람의 시원함과 햇빛의 뜨거움조차 생명의 발현임을 깨닫게 되고 옆에 있는 사람이 경이로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아~~ 산다는 것은 이 얼마나 오묘한 조화인가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