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病 ; sickness)도 병인지 알고 나서야 아프기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지난주는 여름휴가차 방콕과 파타야에서 보내다 돌아왔습니다. 방콕에서 3일을 잘 돌아다니다 파타야로 넘어가는 날 아침, 호텔 체크아웃시간이 낮 12시인지라 그 시간대에 맞춰 차량 픽업신청을 해놓고, 오전 시간에는 여유롭게 호텔 조식을 먹고 수영장에 내려가 시간을 보내기로 합니다. 객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는데 왼쪽 다리 허벅지에 붉은 반점들이 보입니다.
앗! 이게 뭐지!!
그렇다고 가렵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건지 머리를 마구 굴려봅니다.
제일 먼저 드는 의심이, "지난밤 스파에 가서 마사지를 받아서 그런가?" 하는데 미칩니다. 오아시스 스파라고 호텔이 있는 수쿰빗에서 가까운, 방콕에서 크고 유명한 스파 전문점에 예약을 하고 갔습니다. 핫 스톤 마사지와 아로마 마사지가 포함된 1인당 15만 원이나 하는 2시간짜리 럭셔리 스파를 신청했습니다. 사실 이 스파 예약은 딸아이가 해준 겁니다. 마침 제가 방콕에 있을 때 딸아이도 근무로 와 있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갔습니다. 마시지는 제 취향에 맞지 않아 내 돈 내고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남들은 마사지하고 나면 개운하다고 하는데 저는 한 번도 그런 체험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됐든 비싼 값을 한다고 스파에서의 시간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스파가 끝나고 설문조사도 합니다. 모든 항목에 만족 표시를 해주었습니다. 와이프는 아로마 향이 강해서 마음에 안 든다는 쪽 체크를 했더니 어느 정도였는지 묻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이라 와이프는 향이 강했던 모양인데 저는 괜찮다고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 왼쪽 다리 허벅지 안쪽으로 붉은 반점이 여기저기 보였던 것입니다. 스파에서의 핫스톤 마사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의심은 호텔방 침대에 서식하는 배드버그가 아닐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5성급 호텔에서 침구류 및 벌레 퇴치를 소홀히 했을 리는 만무했지만 일단 의심을 해보기로 하지만 이틀이나 잤는데 이제야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 호텔방의 베드버그는 일단 배제하기로 합니다. 벌레에 물리면 즉각 증상이 나타날 것이고 가렵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렵지가 않으니 일단 수영장에 내려가 오전 시간을 잘 보냈습니다. 오후에는 파타야로 넘어갑니다. 파타야에서도 스노클링 다니고 리조트 수영장에서 빈둥거리고 잘 놉니다. 왼쪽 허벅지에 증상이 있는지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서울로 돌아와서 집에 도착하여 샤워를 합니다. 왼쪽 허벅지의 붉은 반점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샤워를 끝내고 물기를 닦느라 거울을 보는데 힐끗 왼쪽 엉덩이 위에도 붉은 반점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방콕과 파타야에서는 엉덩이 반점까지는 보지 못했는데 집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가렵거나 아프거나 했으면 인지했을 텐데 전혀 그런 증상이 없었던 터라 모르고 있었습니다.
반점 크기가 상당히 커서 동네 피부과를 가보기로 합니다. 여행자 보험도 들어놓고 다녀온 터라 여행 중 질병 보험금이라도 청구해 볼 요량이었습니다. 그동안 해외여행 갈 때마다 여행자보험은 항상 들고 다녔는데 한 번도 보험금을 신청해 본 적이 없습니다. 보험금 청구를 안 한 것이 천만다행인 일이지만 그동안 들었던 여행자보험만 해도 몇 백만 원은 될 듯싶습니다.
피부과에 들러 의사 선생님께 허벅지 증상을 보여줍니다. 의사 선생님 왈 "벌레 물리신 게 아닌데요. 대상포진입니다"
대상포진? 그 말로만 듣던 엄청나게 아프다는 병입니다. 대상포진(Herpes zoster)은 "소아기에 수두를 일으켰던 바이러스가 신경 주위에 무증상으로 남아있다가 면역력이 저하되면 신경을 타고 나와 피부에 발진을 일으키면서 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질병"입니다.
그런데 저는 거의 일주일이 다 되도록 통증을 못 느꼈습니다. 그동안 가렵거나 하지도 않았기에 무시하고 지나쳤던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 왈 "천만다행입니다. 이 정도 증상으로 버티고 계신 게 말입니다. 보통 발병하고 72시간이 지나면 대처가 늦습니다. 그럼에도 통증이 없다는 것은 나름 건강을 잘 유지해 온 덕분인 듯합니다. 오늘 주사를 맞고 약처방도 해드릴 텐데 입원하셨다고 생각하시고 쉬셔야 합니다. 모든 운동 다 중단하시고 그냥 쉬세요. 안 아프다고 무시하시면 큰일 납니다. 진짜 병원에 입원하실 수 도 있습니다."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대상포진이라는 말을 듣고 약처방을 받아 집에 온 순간부터 왼쪽 허벅지와 엉덩이 부분이 뻐근해지면서 아파옵니다. 모르고 있었으면 통증도 없었을까요? 참 희한하죠?
그렇다고 통증이 엄청나게 심한 건 아니고, 운동을 조금 과하게 하면 나타나는 근육통 정도의 통증입니다. 통증도 계속되는 게 아니고 가끔 뻐근해지는 수준이고 붉은 반점이 있는 부위는 가끔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고요. 앗 따가워 정도를 느낄 수준입니다. 그리고 왼쪽 엉덩이와 허벅지에 옷자락이 스치면 기분 나쁜 서늘함이라고나 할까요? 이쪽 부위의 신경들이 예민해져서 만지면 살짝 아프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의 증상입니다.
증상이 지연되었을 뿐, 병명을 알고 나서야 아프기야 했겠습니까만은 지금 당하고 보니 온갖 핑계를 가져다 붙여보고 싶은 게 얄팍한 인간의 심사인가 봅니다.
벌써 3일째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하고 있습니다. 통증은 그저 그런 상태입니다. 아프다고 하기엔 그렇고 그렇다고 안 아프다고 하기엔 그런, 아주 애매모호한 상태라고나 할까요? 붉은 반점들은 외상 연고도 바르고 해서 그런지 많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이렇게 잘 버텨보겠습니다. 건강은 과신하는 게 아닌 듯합니다. 나름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너무 과하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운동 시간과 패턴도 돌아보게 합니다. 세상 사는데 만만한 게 하나도 없죠? 언제 어디서든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현상에 대처하며 사는 게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