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hengrin Jun 22. 2020

나는 어떤 온도로 세상을 느끼는가?

달력을 쳐다보니 어제가 절기상 하지(夏至)였습니다. 24절기 중 열 번째 절기로, 한해중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아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오늘은 하지에서 하루가 지났으니 벌써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밤의 길이가 길어지고 있는 시간에 들어서 있습니다.


생명과 삶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방향성을 가지고 간다는 주기의 논리를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공변 하는 상대적 시간이라 방향성을 갖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지만 주변의 현상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간이 세상을 왜곡되어 표출시키고 인간의 시선은 그 현상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진실이 왜곡되어 보이는 현상, 현상론입니다.


단적으로 절기상 하지이면 태양의 고도가 제일 높아 열에너지를 대지가 가장 많이 받을 때이므로 제일 더워야 함이 맞습니다. 하지만 1년 중 제일 더울 때는 하지를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이 제일 더워 7월 말 정도가 됩니다. 이 현상은 왜 그럴까요? 바로 대지가 열에너지를 받아 복사열을 내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현상이 진실을 왜곡되게 보이게 하는 대표적 형태입니다.

흥하면 쇄하는 법. 기세 등등하던 태양의 시간도 이미 밤의 시간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어 줍니다. 아직 작렬하는 태양을 온몸으로 맞아보지 못했기에, 뜨거운 삼복더위의 삼계탕조차 먹질 않았기에 우리는 태양의 시간이 더 우세하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뿐입니다. 


온도에 대한 기억의 착각과 체감의 착각으로 인해 최고의 더위에 휴가를 보내는 시간 속에 있으면 이미 태양의 기울기가 밤을 향해 가있음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찬바람 한자리 스치고 지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태양의 시간이 한참을 지나왔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의 기억 속에서 절기의 마디 표시는 아주 현명한 되새김의 이정표가 됩니다. 하지의 한자음을 보면 '여름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여름의 절정인 소서와 대서가 기다리고 있어 여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경계 표시이기도 합니다.


주말 내내 작렬하는 태양이 하지의 위세를 표현해 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인 오늘 아침 출근길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에 다소 선선합니다. 낮과 밤 일교차가 심한데 그 경계선인 아침시간은 그래도 선선함이 지배하는 시간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다가 불현듯 그 더위의 기준에 대한 생각을 붙잡게 됩니다.


지금 나 혼자만 선선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인과관계로 인하여 선선하게 느끼지? 지난해 오늘과 비교해서 변한 것이 과연 무엇이지? 대기의 온도차야 수시로 바뀌는 것이니 변수로 감안해두기로 하고 

과연 나란 존재는 변하지 않았을까? 변수로 넣기에는 너무 미미한가? 지난해 이맘때의 체력 조건이 오늘 이 시간과 과연 똑같았을까? 분명 차이가 있음은 불문가지일 테고 --- 그럼 같이 변하는 공변화의 조건 속에서 덥다 선선하다의 기준은 무얼까?


손톱 크기의 1 스퀘어미터 안에 광자 1 분자가 들어와도 10의 19 승개에 달하는 변수가 생기는 엔트로피의 세계인데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태양의 포톤을 모두 구좌표 변환하여 표시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너무나 큰 숫자여서 무한대의 확률이라고 두리뭉실 표현해야 더위와 온도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이해 가능한 것일까?

남들은 덥다고 하는데 나는 선선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무한대의 확률로 존재하는 현상의 한 단면을 표현하는 언어적 한계에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천차만별 다른 감각으로 느끼게 되는 온도를 우린 온도계라는 도구로 표준화시켜 바라보게 합니다.


"지금 온도계가 23도인데 바람이 산들산들 부니 선선하다고 느껴지나?" "낮에는 33도까지 올라간데 폭염으로 푹푹 찔 거야 어떻게 버티지?" 이런 범주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이 느끼는 온도차는 생물의 수만큼의 온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에너지 보존상태에 따라 외부 환경을 받아들이는 조건이 다른 것이죠. 당장 심호흡 한 번만 해도 피부가 느끼는 온도차가 달라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언어적 한계에 갇혀 다양성을 보지 못합니다. 아니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치 빛에 반사되는 색깔을 우린 무지개색 중 하나로밖에 표현하지 못하고 그 표현의 의미에 갇혀 하나의 색으로 밖에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옆에 놓인 차 한잔의 온도가 적당히 미지근해졌습니다. 호호 불지 않고 입안 가득 머금을 수 있습니다. 온도란 내가 수용할 수 있을 때를 적당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차거나 너무 뜨겁지 않은 중용의 상태와 같이 팽팽한 온도. 바로 인지적 온도가 세상의 온도를 느끼는 척도가 아닌가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비 그리고 나무와의 대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