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 책 한 권 가져가시나요?

by Lohengrin

장기간 여행을 떠나실 때 책 한 권이라도 백팩에 넣어 가시나요? 뭐 누구랑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여행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리조트에 편안히 쉬러 가는지, 바쁘게 여기저기 관광을 다닐 것인지 등등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안에서라도 책을 읽어볼 요량으로 얇은 시집이나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한 권 책장에서 꺼내 백팩에 넣어가기도 합니다.


휴양지 백사장 야자수 아래에서나 리조트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 서양인들의 모습은 항상 부러운 여행지 장면중 하나로 떠올라, 적어도 그 정도는 해주어야 휴가를 와서 쉬었다고 할 수 있다고 최면을 걸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감생심, 대부분 백팩 속의 책들은 아마 한 번도 꺼내지지 못하고 여행 내내 등짐으로 전락할 가능성 많습니다.


평소에도 책을 잘 안 읽는데 리조트 선베드에 누웠다고 해서 읽힐 리 만무하고,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독서등 켜놓고 책을 폈다고 해서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서양인들 따라 해보고 싶어 책은 펼쳤지만 지나가는 비키니 수영복 입은 여자나 근육질 서양남자가 더 눈에 들어옵니다. 눈은 선글라스 너머 장면에 꽂혀 있습니다. 책 읽는 흉내는 내지만 글자를 읽는 게 아닙니다. 그냥 들고 있을 뿐입니다.


남 이야기가 아니고 제 이야기임을 고백합니다.


그나마 책을 가장 많이 읽을 수 있는 시간은 비행기를 타고 갈 때입니다. 유럽이나 미국 정도를 가면 11시간 이상 가야 하니 나름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상 보는 시간적 여유일 뿐임을 눈치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막상 비행기를 타면 공항에 서둘러 나오느라 일찍 움직여서 피곤한 기운이 몰려듭니다. 이륙준비하고 어쩌고 하다 보면 식사시간되고 기내식 먹고 나면 식곤증이 몰려와 비몽사몽 잠을 청하게 됩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흐르고 정신이 좀 들라치면 좌석 앞에 있는 개인용 비디오모니터에 눈길이 갑니다. 최신 영화 수십 편을 골라볼 수 있습니다. 책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영화들이 있는지 검색만 해볼까 하고 여기저기 넘겨봅니다. 그러다 영화 한 편에 꽂혀 보면 2시간이 후딱 지나갑니다. 책은 기내지와 함께 좌석 포켓에 얌전히 꽂혀 있습니다. 기내 조명도 침침한데 눈도 나빠질 것이라는 위안 아닌 위로를 하고 안심을 합니다.


그렇게 기내 영화 2편 정도를 보면 다시 기내식을 먹습니다. 그다음에는 그냥 잠을 청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때부터는 착륙하고 나서의 일정이 머릿속을 채웁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전철을 탈 것인지, 우버를 부를 것인지, 호텔 예약은 잘 되어 있겠지 하는 걱정까지 겹쳐져 있습니다. 책에 손이 갈 여유가 점점 없어집니다.


기내에서 읽겠다던 책은 그렇게 좌석 포켓 전시용으로 꽂혀있고 책 제목만 눈에 담고 다시 백팩으로 들어갑니다. 리조트에 가서 읽을 거라는 미안함을 대신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리조트에 가서도 책은 백팩밖을 나올 기미가 없습니다. 한가로이 앉아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리조트 수영장을 왕복해야 하고 전용 해변에 내려가 스노클을 착용하고 바닷속을 탐험해야 합니다.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저녁에는 검색해 놓은 맛집을 찾아갑니다. 적어도 해외에 나왔는데 이 지역의 와인이나 맥주 정도는 마셔줘야 합니다. 리조트에 들어오면 약간 얼떨떨합니다. 피곤이 몰려옵니다. 침대에 누우면 그냥 잠에 떨어집니다. 그리고는 아침을 맞습니다. 여행 내내 반복입니다. 책은 그저 같이 여행을 온 파트너로 빈 방을 지키는 파수꾼일 따름입니다. 하우스키핑 룸메이드에게 한국어 책의 글자는 이런 것이야를 알려주는 한류의 역할을 맡겨놓을 뿐입니다.


사실 책은 평소에 읽는 것입니다. 여행 가서 읽는 책이, 분위기도 다르니 더 잘 쏙쏙 읽힐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30년 넘게 여러 여행을 다니며 거의 항상 책 한 권은 백팩에 넣고 다녔지만 책을 절반이상 읽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많이 읽었다고 하는 경우가 겨우 책의 1/3 정도 분량을 읽었으려나?


물론 서양인들과 여행패턴이 달라서 그런 것도 있을 겁니다. 서양인들은 보통 열흘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 리조트에 짱 박혀 말 그대로 휴양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오랜 시간 머무니 당연히 할 일 도 없고 책을 읽는 게 시간 보내기에 좋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대부분 한국인들의 여행 패턴은 동남아는 3박 4일, 유럽 정도 가야 일주일 정도의 일정으로 움직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며 봐도 모자랄 시간입니다. 빨리빨리 움직여 많은 것을 봐야 하고 많은 것을 카메라에 담아야 합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외치며 주마간산으로 달려갑니다. 이런 일정에 책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여행하면서 책을 읽고 싶은데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핑계를 대봅니다. 누구에게는 진정한 여유이고 누구에게는 허세가 되는 '여행 중 책 읽기'는 그런 모습이 됩니다. 평소에도 책을 안 읽는데 여행지에서 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 시간도, 그럴 여유도 없는 게 우리의 여행습관이자 패턴입니다. 여행이 여유로 읽힐 날이 있을까요? 퇴직을 하면 그런 여행이 가능해질까요? 태양빛 작렬하는 백사장 옆 선베드에 누워 책을 펼쳐 들고 선글라스 너머 선남선녀를 관찰하던 시선을 책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을까요? 참 쉽지 않을 겁니다. 여행의 목적이 많이 보고 많이 먹는 체험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행길에 책을 안 읽는다고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둘 사이는 전혀 관계없는 상관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그저 즐거우면 되고 그저 쉬다 오면 족합니다. 많이 보고 많이 먹어 경험치를 올려놓고 이야기 소재를 하나 더 늘려놓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면 됩니다. 책 한 권은 그 이야기 소재를 풍족하게 하는 소재로 작동할 뿐입니다. 시간을 때우는 타임머신일 따름입니다.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그나마 책을 읽으면 여유 있어 보이고 고상해 보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행은 잘 먹고 잘 놀다 오면 최고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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