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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24. 2020

시간의 영상필름


아침 글을 쓰기 위해 메일함을 엽니다. 어제 쓴 글들과 그동안 예전에 썼던 글들이 포도송이처럼 아래로 펼쳐집니다. 인생의 어느 날 어느 시간, 어떤 생각과 고민과 상상을 했는지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제목과 사진을 곁눈질하는 것만으로도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기에 충분합니다. 화면을 아래로 후루륵 끄집어내려 봅니다. 시간의 기억은 화면을 타고 거꾸로 되살아 납니다.


그저 가감 없이 예전에 썼던 글을 읽어보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합니다. 가끔은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할 때가 있습니다. 기억의 책장을 넘겨 타임머신처럼 과거를 현실로 가져와 봅니다. 아침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긴 시간이 흐를 동안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채워졌을까요? 변하지 않고 채워지지 않았으면 또 어떻습니까. 정지되어 있는 동영상의 스틸 화면처럼 기억의 한켠에 새겨져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소중한 추억의 자료입니다. 기억의 기록으로 이렇게 남아 있어 다시 불러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화면 속 그날의 기억"은 간직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회상할 수 있는 현재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없으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라는 이탈리아 과학자가 쓴 'The order of tim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번역된 제목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입니다. 시간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석으로 유명한 책입니다. 로벨리는 "시간은 사물의 변화에 맞춰 우리의 상황을 규정하는 방식이자 날짜의 변화와 계산에 맞춰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이다. 시긴은 변화의 척도이다. 아무 변화도 없으면 시간도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접근법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이 아닌가 합니다.


시간은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구라는 행성의 지표면에 사는 모든 생물 중에서 유일하게 해와 달의 운행 주기를 기본으로 시간이라는 형이상학적 지표를 만들었습니다. 이 지표가 생활의 모든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어떤 동물도 허공에 숫자를 부여하여 시간이라고 붙잡아 놓고 구속되지 않습니다. 바로 인간은 사회화의 관계 속에 시간이라는 기준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시간의 관점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꾸어 놓습니다. 인간적 관점으로 시작된 시간이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그 시간의 해석에 붙잡혀 있습니다.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현상 속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순서(sequence)와 인과관계 모두 흐름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것이 시간으로 해석되고 4차원 공간으로 확장됩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놓고 갇혀버린 형국이지만 그 형세를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것 또한 인간입니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을 존재한다고 정의해 놓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정의하고 사는 게 우리의 삶이자 모든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정의하면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만 하고 살아도 부족한 시간으로 환생을 합니다. 그리움이 있다면 당장 봐야 합니다. 부족한 사랑이 있으면 당장 전화하고 채워줘야 합니다. 이것이 시간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이며 이 해석이 과거의 시간을 영상필름처럼 돌리는 트리거가 됩니다.


글로는 이렇게 주장해놓고 정작 나는 시간에 대한 사랑을 하질 못합니다. 이 이율배반적 모순의 근원은 어디서 발현되는 것일까요? 그래도 선언적 주장을 해놓으면 등 떠밀려서라도 실천을 할 것이기에 한 걸음씩 나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포옹하고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줄 수 도 있을 겁니다. 시간 속에 같이 있는 그대를 말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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