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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Jun 25. 2020

한국전쟁 포화를 넘어 환생한 산수국

70년. 한반도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처절했고 가장 가슴 아픈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지나온 세월입니다. 땅을 넓히는 전쟁도 아니고 원한의 복수를 위한 한풀이도 아닌 허깨비와 같은 이념의 허상으로 벌어진 패악이었습니다. 두 세대가 지나갈 만큼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청산되지 못하고 현재형으로 작동하고 있는 기현상을 현실에 마주하고 있음이 허탈하기까지 합니다. 이념의 허상을 쫒아 아직도 공갈과 위협과 잔머리가 난무하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경험했던 세대들이 이제 10% 정도나 생존해 계실까요? 그 험난했던 세월을 살아내신 것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특히 그 허상의 참화에서 꽃 지듯 생명을 던져 지켜낸 순국선열들께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은 오늘 머리 숙여 존경과 경이와 감사를 드리며 회사 건물 한켠에 피어난 산수국 한 송이 꺾어 바칩니다.

비 내리는 출근길.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느라 시선을 옆으로 돌릴 여유도 없이 발끝만 보게 됩니다. 본능적으로 건물 입구에 다다라 건물 시큐리티 담당 직원분과 인사를 하고 회전문을 밀고 들어오려는 찰나, 갑자기 건물 옆에 있는 산수국 나무가 떠오릅니다. 제 친한 친구 녀석이 지난주에 페이스북 페이지를 진보라색 산수국으로 장식했던 모습과 오버랩되었습니다. 꽃에 관한 한 식물학 박사인 녀석인데 이 아침에 갑자기 친구 녀석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산수국과 회사 옆에서 자라고 있는 산수국이 겹쳐진 것입니다.


사실 요즘 한창 산수국이 피어 절정의 모습을 보일 때이긴 할 텐데 코로나 19로 인해 방문객 및 직원들의 체온 체크를 하느라 회사 건물로 들어오는 옆 출입구를 닫아놓고 정문 출입구만을 열어 놓아서, 건물 옆에서 자라고 있는 산수국을 보지 못한 관계로 잊고 있었습니다.


회전문을 밀다 말고 뒤돌아 건물 옆으로 가봅니다. 산수국과 마주 합니다. 내리는 비에 색깔을 씻어 냈는지 청보랏빛 꽃들이 예쁘게 인사를 합니다. 6.25 한국 전쟁의 포연 속에서 산화한 어느 무명용사의 애닮픈 눈빛처럼 보입니다. 영령들께 명료한 이 아침의 산수국을 바칩니다.


우산을 쓰고 찬찬히 비를 맞고 있는 산수국 나무를 일견 합니다. 회사 건물 한켠에서 건물의 그늘에 가려 햇빛을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음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웠습니다. 매년 이맘때 예쁜 꽃을 피워내 생명의 온전함과 살아있음을 전합니다.

산수국 꽃을 보면, 식물 진화의 다양성에 대한 한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산수국 꽃에는 헛꽃이라는 무성 꽃이 있습니다. 수분을 하는 암술과 수술의 본래 꽃과 함께 꽃받침이 변하여 꽃처럼 보이는 헛꽃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꽃이 커 보이고 예뻐 보이게 하려는 이 전략을 어떻게 진화시킨 것일까요?


동물처럼 움직일 수 없는 식물들은 매개체를 활용해야 합니다. 바람이 될 수 있고 비가 될 수 도 있으며 움직일 수 있는 새와 나비, 벌과 같은 생명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번식을 하여 생명을 이어가는 개체로서는 식물이 동물보다 더 다양한 형태의 번식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세포 동물들은 암수의 섹스 행위를 통해서만 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행위 자체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러나 식물의 번식을, 유전자를 전달하는 섹스의 일종으로 봤을 때 그 행위는 정말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겁니다. 스스로 유전자를 전달하지 못하면 다른 생명체를 다양하게 이용하고 그 이용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엄청난 시각, 후각적 효과들을 개발해 냈습니다.


산수국만 해도 그렇습니다. 꽃받침을 변형시킨 가짜 꽃인 헛꽃을 만들어 곤충을 유인하여 암술과 수술을 수분시키는데 활용하고 있습니다. 산수국 말고 일반적으로 많이 보는 수국은 바로 산수국의 헛꽃만을 육종하여 화사하게 변형시킨 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수국은 혼자서는 번식을 할 수 없어 꺾꽂이나 휘묻이를 해주는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번식시켜줘야 합니다.


산수국 꽃은 얼마나 예쁜지요. 헛꽃도 연분홍과 옅은 파란색입니다. 본래 꽃도 짙은 파란색에 흰색의 수술들이 안개꽃처럼 모양을 만들고 있습니다. 산수국 꽃 한 송이는 신부의 부케 그 자체 같습니다. 헛꽃은 본 꽃이 수분을 하면 색깔이 흰색으로 변해가며 하늘을 보고 있던 헛꽃이 뒤집어져 뒷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수국은 신기하게도 한 그루에서 흰색, 분홍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깔의 꽃을 피웁니다. 이는 수국이 가지고 있는 '델피니딘'이라는 색소 때문이라는데요. 이 색소는 토양의 산성도에 따라 색을 바꾼답니다. 산성토양에서는 알루미늄 이온을 흡수해 파란색을 띠는데 수국의 본래 색깔은 분홍색이랍니다.


식물의 진화는 이렇게 오묘하게 적응하여 그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꽃의 번식과 관계없는 인간의 시선으로 봐도 예쁜데 벌이나 나비 곤충들이 보는 자외선의 시각으로 보면 얼마나 더 예쁠까요? 물론 인간의 시각입니다. 자외선 영역에는 가시광선 영역처럼 색깔 분리가 안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볼 수 없는 파장입니다. 하지만 곤충들은 자외선 영역에서 생명의 꿀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동물처럼 수정체를 가진 눈이 아니라 곁눈이 대부분인 곤충들이 자연에서 생존하는 방법으로 터득한 것이 자외선을 인지하는 쪽으로 진화했고 이를 눈치챈 식물들은 헛꽃을 만들어 자외선 영역을 넓혀 곤충을 유혹해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곁에 있는 식물 한 그루에서조차 생명의 진화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고 뿌리 뽑아 버릴 잡초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보도 사이에 자라는 이름 모를 잡초조차도 생명의 무한한 동작이 숨 쉬고 있습니다. 부슬비 내리는 지금 이 순간, 주변을 돌아보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감사할 일입니다. 6.25 한국 전쟁, 70주년의 아침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잔인한 전쟁의 상흔이 산수국의 진청색으로 애뜻하게 다가오지만 부케처럼 화사한 눈가림으로 가려지고 있는 것 같아, 베인 상처에 소금 뿌리듯 더욱 생생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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