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이 되었다 - 정년퇴직 백서 19
정년퇴직 이후의 시간을 설계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돈의 흐름을 추적하다 보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수입 부문에 대해서는 철저히 따지는 것 같은데 지출되는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예측컨대 아마 연금 등으로 통장에 찍히는 금액의 절반 가까이가 다시 세금이나 기타 지출로 빠져나갈 것이다. 좀 더 철저히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못가 다시 취업 전선으로 뛰어드는 시간이 빨라질 수 있다.
어제 퇴직연금 및 개인연금으로 들어오는 대략의 통장 숫자를 깠다. 고용보험공단에 신청해 9개월 동안 받을 수 있는 실업급여 월 180만 원 정도를 포함하면 대략 월 430만 원 정도의 숫자가 나온다. 실업급여는 기간이 한정된 금액이니 일단 제외하고 250만 원 정도를, 국민연금을 수령할 때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정해 보자.
이 250만 원을 오롯이 내 개인적 용돈으로 활용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언감생심, 택도 없음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자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차감되는 액수를 따져보자.
먼저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항목들을 추려보자.
보험료가 있다. 나는 2개의 보험을 들고 있다. 하나는 'ABL 알리안츠파워종신보험'으로 매달 85,900원이 빠져나간다. 이것은 가입한 지가 얼추 20년에 가까워 내년 정도만 납입하면 되는 금액이나 일단 매월 자동이체되어 통장에서 사라진다. 또 하나의 보험은 'LIG 희망을 가득 담은 건강보험'으로 이것도 매달 39,545원씩 공제된다. 이것도 20년 만기로 가입한 지 12년 차다. 보장성이라 만기가 돼도 환급금이 없긴 하다. 두 보험을 합하면 매달 125,445원이 빠져나간다. 그나마 이 돈은 나의 남은 미래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병원신세에 대한 보장이므로 당연히 감수할 수 있고 해야 하기에 해약하면 안 된다는 최면을 걸고 있는 항목이다.
아파트 관리비도 있다. 전기, 수도, 가스료 등 포함되어 있는데 지난달에 230,000원 정도를 냈다. 계절에 따라 월별로 조금씩 편차가 있겠으나 일단 지난달을 기준으로 해보자.
휴대전화 통신비도 있다. 지난달에 46,890원을 냈고 여기에 OpenAI 월 이용료로 29,900원을 낸다.
육체 건강을 위해 끊어놓은 피트니스센터는 연회비가 60만 원이니 한 달에 50,000원이고 골프실내연습장도 연회비가 55만 원이니 두 회비를 합쳐 매달 10만 원씩 지출되고 있는 셈이다.
정신 건강을 위해 정회원으로 등록해 자연과학공부를 하는 단체인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은 연회비가 60만 원에, 봄가을로 오프라인 강의를 20만 원씩 주고 참가하고 있으니 월 10만 원 정도를 쓰고 있다. 기타 회비를 내는 친목모임이 4개 정도 있어 여기에 들어가는 정기 회비가 매달 약 15만 원 정도가 든다.
지금까지 열거한 액수는 그나마 눈에 보이는 돈이지만 매달 지출되어야 한다. 여기에 쓰는지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신용카드 지출이 있다. 나는 지난달 1,223,571원이 결제됐다. 지하철 교통비도 있고 자동차 기름값도 있고 1월에 갈 오키나와 가족여행 항공권 결제와 골프장 간 비용 등이 포함되어 있고 점심 저녁 식사약속으로 내민 품위유지비도 포함되어 있다.
경조사비도 있다. 이 역시 예상하지 못하는 돌발변수이긴 하지만 매달 30만 원 이상 나가는 듯하다.
여기에 자동차 연간 보험료 (393,090원 / 12 = 월 32,758원)도 있고 갑상선암 수술 이후 매년 정기적으로 검사하는 CT촬영 및 초음파 검사료, 그리고 액상 비타민 D와 환자전용 종합비타민제인 아로나민골드 케이사이정 1년 치 구입비용을 합하면 이것도 300,000만 원이 넘는다. 매달 지출비용으로 나누면 역시 한 달에 3만 원 정도가 든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눈에 보이고 가려낼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항목이 튀어나온다. 바로 세금과 건강보험료다.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으니 재산세를 내야 하고 자동차를 가지고 있으니 자동차세도 내야 한다. 재산세와 자동차세는 그동안 내왔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항목이다. 하지만 건강보험료는 완전 눈탱이 맞는 항목으로 닥쳐온다.
건강보험료는 직장 생활할 때는 회사에서 절반을 부담하고 있어서 내가 얼마나 내는지 별로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것조차 급여에서 공제하고 입금해 주니 얼마의 건강보험료를 내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나도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이번달 말일이 되면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예상컨대 아마 30-40만 원 정도는 될 듯하다. 통장에 들어오는 수입은 없는데 건강보험료는 매달 빠져나간다. 줄어드는 통장의 숫자가 단위를 바꿀 때마다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앉는다는 선배들의 증언이 실감 나게 다가올듯하다.
자 그럼 대강 한 달 수입과 지출 계산을 해보자. 수입은 연금액수로 정해져 있다. 더 들어올 틈은 전혀 없다. 실업급여 제외하고 들어오는 돈은 월 250만 원이다. 사실 이 돈도 내가 그동안 모아둔 돈을 나눠 입금받는 피 같은 돈이다. 지출은 어떤가?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지출내역을 대략 더해보면, 매월 정기적으로 내야만 하는 돈이 대략 120만 원 정도에 건강보험료를 포함하면 160만 원가량 된다. 여기에 재산세 및 종합소득세, 자동차세 등을 납부하면 200만 원가량은 매월 고정적으로 빠져나간다고 봐야 한다. 나머지 돈으로 품위유지하는 용돈으로 써야 한다. 지난달 결제한 신용카드 금액 120여만 원을 놓고 보면 결과는 -70만 원 정도 적자다.
갑자기 앞이 캄캄해진다. 연금이라고 받는 그 돈이 내 돈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든다. 지출을 줄일 수 있는 항목은 오직 품위유지비 밖에 없음을 직감한다. 신용카드를 덜 쓰는 길 밖에 없다. 이것은 결국 대인관계를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까발려놓고 보니 돈의 무게가 참으로 가볍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덜 쓰던가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다시 벌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퇴직 후 논다는 꿈과 희망은 허상이고 돈의 실상은 현실이다. 내려놓고 맞춰 살면 살기야 하겠지만 돈의 흐름을 다시 촘촘히 들여다봐야겠다. 새는 구멍이 어디인지, 메꿀 수 있는 건지도 살펴봐야겠다. 노후의 삶이 그렇게 녹녹지만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돈 새는 제일 큰 구멍은 건강을 잃고 병원을 들락거리는 거와 자녀들 결혼시키는 거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들여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