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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리 Oct 27. 2022

갤러리에서 나온 여자

8. 가든 한가운데

 그녀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지구상 제일 오래된 런던의 깊은 지하철역을 지상으로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 양 쪽 일렬로 붙어있는 광고판처럼 까만색 액자들이 계단 양쪽으로 비스듬하게 가지런히 붙어있었다. 점점 계단을 올라갈수록 지하의 공기를 깨우는 신선한 나무 냄새, 비에 젖은 풀 냄새가 진하게 넘어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신선한 공기를 향해 홀린 듯이 걸어 올라간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올리자 왼쪽 프레임에서 은은한 초록 광선이 켜졌다 꺼졌다 하며 시선을 끌었다.


 Turn your right frame anti-clockwise


 메시지가 사라지자 1부터 12까지 숫자가 왼쪽 방향으로 즉 거꾸로 적힌 시계가 나타났다. 그리고 초침과 시침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른쪽 벽의 액자를 쳐다보니 왼쪽 액자와 같은 푸르스름한 광선이 상하를 가로지르며 사라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 비스듬한 액자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 바로 서게 하였다. 계단의 센서등이 꺼지고 까만 정사각형이 투명한 창문으로 바뀌었다. 연극의 조명이 켜지듯 까만 정사각형 가득 눈부신 연초록 나뭇잎이 꽉 찬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맥주 거품 같은 하얀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마침 다람쥐가 나무를 오르고 흔들리는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일렁일렁 비치며 그야말로 그림 같이 이쁜 찰나였다. 잠시 스며들어오는 푸른 공기를 폣속 깊숙이 마셨다. 창문 양쪽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가 보였다. 양손으로 잡고 밀자 부드럽게 들어 올려져 계단을 2-3개 더 만들었다. Tree House의 가든 한가운데였다. 다시 손잡이를 살짝 끌어당기자 쉽게 접어 닫혔다. 이게 있는지 왜 몰랐을까. 입구가 닫히니 흡사 오래된 우물을 막아놓은 듯한 벽돌구조물이 살짝 튀어나와있는 것 뿐 수상한 것은 없어보였다.


 야옹


 호루라기가 어느새 그녀 옆으로 걸어와 살짝 돌출된 사각 구조물 위로 가뿐하게 뛰어올라 앉았다.


 '너는 알고 있었구나...'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호루라기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의 품으로 슬며시 파고들었다. 다른 생명체의 온기가 그리웠던 그녀도 호루라기를 들어 안았다. 가든을  바퀴 돌고  옆을 따라  좁은 길을 돌아 걸으니 거실로 연결된 문이 나왔다. 거실 중앙에  보던 것이 놓여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조각상. 항공모를  남자는 어디론가로 떠나고,   뒤로  여자는 반대편을 보고 서서 울고 있었다. 머리가 쨍하고 아팠다. 호루라기를 바닥에 놓아주고 주방의 아일랜드 테이블에 잠시 기대어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땅으로 꺼질 듯이 몸이 무거워졌다. 방으로 간신히 몸을 움직여 다행스럽게도 정신을 잃기 직전 하얗고 차가운 네모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참을  없는 무거운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그 집의 거실에 다시 서 있었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지만 역시 토끼굴에 빠지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몸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길게 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다시 그림 속으로 돌아가도 좋아. 어쩌면 확실히 그녀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제약 속에서 안전하게 세상을 관찰만 하던 그때로 돌아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꿈을 꿨다 생각하지 뭐. 하지만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 회색 모자를 눌러쓰고 그녀를 가끔 보러 오던 그 사람!! 이대로 그림 속으로 돌아간다면 앞으로 운 좋게 그 사람을 다시 갤러리에서 만나도 그저 만나는 것뿐, 말 그대로 그뿐이라는 것이었다. 멈춘 달력처럼 거기에서 모든 것은 멈춰서 채워지지 않는 질문을 가슴속에 영원히 안고 존재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을 뿐이었다. 일어나야 했다. 질끈 눈을 감고 지금 눈을 떠야 한다고 맘 속으로 외쳤다.







 팟


 눈이 떠졌다. 그녀의 방이었다. 천장의 동그란 조명을 세었다. 정확히 7개. 변함없이 7개가 박혀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창 밖으로 익숙한 반가운 나무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노랗고 푸르던 햇살은 지고 공주 빛 수채화 물감이 간지럽게 춤추듯 섞인 석양이 하늘에 낮게 깔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아니면 며칠하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침대 양 옆 사이드 테이블 위로 물병과 잔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하얀 스카프가 휘날리는 푸른 바닷가 사진이 프린트된 작년 7월의 달력이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 물을 떠놓은 적이 없었다. 문 밖으로 커피 향이 나는 것 같았다. 호루라기가 기분 좋게 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

감사합니다. 다음 회에 마지막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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