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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보리 Oct 30. 2022

갤러리에서 나온 여자

9. The Tree House 나무집

 침대에서 문으로 옮기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은 커피 향에도 각성이 되듯 정신이 바짝 들었다. 옷매무새를 살짝 고치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달력 위에 놓인 날카롭게 깎인 연필을 손바닥에 꽉 쥐었다. 문을 살짝 열자 호루라기가 소파 앞에 앉아서 장난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유령처럼 발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호루라기가 이내 소파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녀도 재빠르게 발을 옮겨 소파를 전면으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녀는 순간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얼음처럼 굳었다.


 동그란 베이글을 조각조각 나누어 늘려놓은 듯한 베이지색 면소재 소파에는 그녀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던 그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그림 속에 살 때 그녀를 종종 보러 왔던 그 알 수 없던 아리송한 얼굴로! 도무지 궁금해서 이대로 세상을 떠날 수는 없게끔 만든 그 사람이었다.


 쓰고 온 황토색 모자가 남자가 앉은 옆에 있어 이번에는 그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소파 앞 무릎 높이의 오크나무 커피테이블에는 토끼가 스케치된 하얀 커피잔 속의 커피가 거의 바닥을 보일 듯 말 듯 비워져 있었다. 마치 잘 어우러진 대형 크림색 티컵 세트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옆에 앉은 솜뭉치 같은 호루라기는 흡사 커피잔 속 우유 거품 같았다. 우유 거품을 털어내는 듯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 일어났네. 잘 잤어요?'

 '아'

 '갑자기 찾아와서 놀랬겠지만 난 이 집주인인 남우입니다. 여기서 지내는 것은 편안했나요?'

 '남우... 누구시죠? 저를 어떻게 아시는 거죠?'

 '음, 이야기가 깁니다. 따뜻한 차 한잔 타 드릴게요. 그러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대답할 새도 없이 남우는 능숙하게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그의 머리맡 서랍장 아래 버튼을 살짝 눌러 선반이 열리자 포트넘 앤 메이슨의 티백이 빼곡히 담긴 나무 재질의 티박스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브랙퍼스트 블렌드, 쥬빌리 블렌드, 레몬 커드, 러시안 캐러반, 로열 블렌드, 다즐링, 아쌈, 모로칸 민트 티백이 빼곡히 들어있었으나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그녀는 그저 지긋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조금 기다리던 남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러시안 캐러반 티백을 2개 꺼내어 얼룩말과 사자가 그려진 티 컵에 하나씩 담아 우려내어 코끼리가 그려진 우유가 담긴 작고 귀여운 병과 함께 쟁반에 올려 가져왔다. 진한 홍차의 향기가 소파 한쪽에 앉은 그녀의 코 끝에도 닿자 각성 상태가 살짝 풀리는 것 같았다.


 '그거 알아요? 우리 지금 처음 만난 게 아니에요.'

.

.

.

.

.

 '우리는 25년 전쯤 알게 되었어요. 스페인의 한 바닷가였고, 많은 걸 잃고 난 후라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고 친구가 되었습니다.'

 '잠시만요. 25년 전이라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니요. 우린 25년 전 7월 스페인의 한 바닷가에서 만났어요. 나도 당신도 거의 미쳐있었죠. 나는 한국전쟁 통에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님을 잃었지만 운이 좋게도 제법 부유한 집안에 입양을 갔죠. 그러다 제임스를 만났고 이 나라 저 나라에 살다가 30년 전쯤 영국으로 왔어요. 그리고 제임스가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몇 년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 아내가 죽고...'

 '아니요. 제임스는 제 남편입니다.'


 남우는 옷깃 너머 가슴팍에서 살갗을 들어 올리더니 얼굴 전체를 덮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올렸다. 그녀는 놀라서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소파를 뒤로 밀치고 일어났다. 마스크를 벗은 그 남자는 여자였다. 그녀는 어깨가 부르르 부르르 떨리며 다시 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모든 것이 생각났다. 그 남자, 아니 그 남자 속에 있던 여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남우는 코트 주머니에서 하얀 스카프를 꺼내어 목에 메었고 마스크를 떼어내느라 빨갛게 부어오른 가슴팍을 덮었다. 그리고 지갑 속에 들어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바닷가에 다정히 서 있는 두 여자의 사진. 한 여자는 남우처럼 목에 하얀 스카프를 하고 있었고, 다른 여자는... 이 여자는...



 그녀가 사진을 들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스카프를 하지 않은 여자가 조금 더 늙은 채로 거울 속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데고 손가락으로 눈썹을 코를 뺨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조금 더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지고 기미가 낀 자신의 손등을 쳐다보았다. 거실에 있던 하얀 스카프를 한 70대의 여성이 느릿느릿 하지만 우아하게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캐런,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다 지나갔어. 그만 아파하자. 우리'


 남우와 캐런은 욕실 바닥에 앉아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모든  차라리 궁금한 채로 두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마주한 진실은 버거웠고  버거웠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남우는 캐런을 안고  번이고  집에서  쉬라고 말하였다.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으로 나무들이 바람에 서로를 흩부끼며 울었다.  



우우우











 영상 속의 남자가 바닷가 모래 위 떨어진 스카프를 들어올렸다. 모래를 탁탁 털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그때 아이를 잃었다. 가족 여행 온 바닷가에서 4살이던 아이는 실종되었고 1년간 그 바닷가를 미친 사람처럼 찾아다녔다. 남우 언니는 영국인 남편이 죽고 남편이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꽤 많은 재산을 배우자로서 상속받기 위해 영국의 법과 편견과 싸우고 있었다. 그건 언니의 존재 자체와 살아온 삶을 문서로 증명하고 증빙하는 일이었고 명예의 실추, 존재의 부정, 위협과 협박이 천천히 영혼을 갉아먹는 지루한 공방이었다. 나는 한국전 후 영국으로 입양을 간 소수의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나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서 내 가정을 이뤘지만, 내 유일한 핏줄인 아이가 사라지자 모래성이 무너지듯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남편도 내 옆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가 사라진 바닷가에서 우는 것도 지쳐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남우 언니가 다가왔고 나에겐 집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내가 계속 모든 기억을 잃고 젊은 여자로 돌아가도 언제든 그 자리에 향기로운 집처럼 있어주었다. 그녀의 집 남우 집, The Tree House에서.





바람에 흩날리며 울어대던 나무가 천천히 움직이며 진정하고 있다. 나뭇잎이 간혹 파르르 파르르 떨리기는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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