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보에따의 직장생활
* 베이지뇨스(Beijinhos)
포르투갈어로 귀엽게 키스를 표현한 단어
* 리스보에따
포르투갈에서 리스본에서 태어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
인사팀에서 회사 내 Diversity Day(다양성의 날)을 맞아 대표로 발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내가 프리랜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회사는 미국계 광고 회사의 포르투갈 지사로, 다양성에 대한 가치를 중요시 여긴다. 인종에 대한 다양성,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존중 등이 그 예로 들 수가 있다. 내부직원들에게 이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일 년에 두 번이나 이벤트를 개최할 정도로, 인사팀에서 꽤 공을 들인다.
행사마다 진행 주제는 조금씩 달리했다. 이번 주제는 각 나라마다 문화와 관습이 다르며, 이로 인해 비즈니스 문화 및 커뮤니케이션 방법 또한 다를 수 있다.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을 포용하자'라는 취지의 행사였다. 그렇게 포르투갈로 이민을 온 직원들 (대부분이 브라질 출신이다)이 겪게 되는 이야기를 포르투갈 직원들과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
HR 매니저로부터 발표 요청을 받았을 때 ‘이를 수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한다고? 그것도 무대 위에서? 잘할 수 있을까?'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발표를 할 때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데, 발표 내용을 준비하는 건 둘째치고 긴장을 다스리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손을 덜덜덜 떨면서 발표를 한 적도 있었고(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떨 때는 호흡을 조절하지 못하고 말을 빨리 해, 숨을 헐떡이며 발표를 한 적도 있다. 청중들에게도 팍팍 티 나는 나의 긴장이 전해진다.
'이것을 무릅쓰고 발표에 응해야 할까?' 만약 발표를 한다고 수락을 하게 되면 발표 내용에 대해 아이디어를 내야 하고, PPT까지 만들어야 하는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수반될 것이 뻔히 보였다. 그리고 이 발표는 무엇보다 페이(급료, 보수)가 없다. 한마디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자원봉사였다. 고심을 하는 와중에 '그래도... 잘만하면 포르투갈 직원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꽤 좋은 기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 직원들이 한국을 잘 모른다고 서운해하는 것보단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 한국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 요즘엔 한국에 대한 지식들이 풍부하다) 프리랜서 계약도 끝나가는 참인데, 내부 직원들 앞에서 하는 발표로 존재감을 높이고 눈도장을 찍어 계약도 연장할 수 있겠다..라는 계산도 아주 조금은 들어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래.. 인생 뭐 있냐.. 잘만 하면 재미있는 추억 하나 만들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은 떨쳐버리고, 발표를 하겠다고 수락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동시에 쪼그라들어, 발표 시간을 5분에서 10분 정도만 하겠다고 말을 했다. (나중에 준비하다 보니 그 짧은 시간에 발표를 하는 것이 더 어려워, 15분 정도로 연장하겠다고 말을 바꾸었지만 말이다.)
내가 발표 주제로 요청받은 건 바로 '포르투갈로 이주해 겪게 된 문화 충격, 포르투갈 직장에서 겪은 문화 차이 등'이었다. 나도 이제 포르투갈로 이주한 지 일 년 반이 넘은 터라 나름 문화 적응은 끝낸 상태였기에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문화 충격이라고 할 것이 있었던가? 혹은 문화 차이라고 할 게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니.. 리스본으로 이주한 이후 내가 겪은 에피소드를 책으로 담은 <리스보에따의 하루엔 느긋함이 있다>의 첫 스토리가 떠올랐다. 내 손으로 쓴 글들이 바로 내가 리스본에서 겪은 문화차이를 담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겪은 문화차이를 쓴 터라,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직장생활을 하며 겪었던 문화차이를 곰곰이 더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포르투갈직장에서는 키스를 남발한다. 이렇게 말하면 오해를 살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입과 입을 맞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만의 인사법인데 한국과는 정말이지 다르다. 유럽도 각 나라마다 인사 문화가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방문했던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에서는 양쪽 볼을 맞대며 입으로 쪽쪽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키스를 날린다. 기본적인 인사 법 중 하나다.
우리나라도 마주치는 사람에 따라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할 때도 있고, 손을 들어 간단히 인사를 할 때도 있듯이, 포르투갈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올라! 봄 디아! (굿모닝)로 인사할 때도 있지만, 친근감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직장 동료는 양쪽 볼을 맞대고 키스를 하기도 한다. 그냥 입으로만 인사하면, 어떤 직원은 '키스로 인사해 줘 (give me a kiss)'라고 하기도 한다.
포르투갈어로 키스는 베이쥬(Beijo). 이를 귀엽게 표현한 단어는 베이지뇨(Beijinho), 복수형으로는 베이지뇨스(Beijinhos) 라고 한다. 사무실에서 앉아서 일을 하다 보면, 방금 막 컨퍼런스 콜을 끝내는 직장 동료들이 상대방에게 베이지뇨스(키스)를 날리며 콜을 마친다. '베이지뇨스 - 뽀뽀'. 사무실 여기저기서 '베이지뇨스- 키스를 보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 같으면 부하 직원이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회의를 마쳤을 것이다. 이곳에선 감사합니다는 물론이며, 그 위에 키스를 날리며 화룡점정을 찍는다.
휴가를 갈 때도 마찬가지다. 휴가를 가는 직원들은 '00월 00일부터 휴가를 갑니다. 급한 용무가 있을 경우 00에게 대신 연락을 취하세요. 베이지뇨스(뽀뽀)‘라고 자동 발송 이메일을 남긴다. 자동 이메일 설정의 멘트조차 마지막은 항상 베이지뇨스다. 포르투갈은 나의 세 번째 해외살이인데, 이렇게 키스를 많이 외치는 나라는 또 처음이다.
다양성의 날 행사는 리스본의 하드락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덕분에 내가 상상했던 딱딱한 분위기에서의 발표가 아니라, 네온 조명과 천장 아래 거꾸로 매달린 캐딜락 차, 기타와 가수들의 앨범에 둘러 쌓인 캐주얼한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직원들은 나누어주는 공짜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상당히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는데, 이렇다면 내가 발표를 하다 좀 막히거나 더듬어도 아무도 모르겠군… 하며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내가 먼저 발표를 하고, 그 이후 브라질 직원이 이어 발표를 하는 순서였는데 그 직원은 본인은 너무 긴장이 된다며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유레카' 나도 맥주 두 모금을 마셨는데, 시원한 탄산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긴장 또한 씻겨 내려갔다.
행사를 시작하는 사장님의 오프닝 스피치가 끝나자마자 바로 내 발표 순서가 돌아왔다. 먼저 직원들의 몰입도(?)를 향상하기 위해, 한국의 일상생활 인사법을 퀴즈로 맞추는 방법으로 소개했다.
A.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사진
B.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하는 사진
C. 합장하는 사진
을 보여주며 어떤 게 올바른 한국의 인사법인지 맞추어 보라고 했다. 퀴즈를 낸 덕분인지 직원들이 집중하며 경청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답은 상황에 따라 A.B.라고 공개 하며,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내가 겪은 포르투갈 직장에서의 문화차이를 설명했다. "눈치채셨겠지만, 한국에서는 인사를 할 때 보통 서로의 몸을 터치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인지 포르투갈 직장에서 동료들이 비즈니스 콜을 끝내며 '베이지뇨(키스)'를 외치는 걸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와요"라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본인들의 문화와 평소 모습을 외국인의 시선으로 상기시켜 주니 재밌어들 했다.
더불어 한국의 직장생활은 산업군마다 다르겠지만 대개의 경우 수직적 조직구조가 많으며 커뮤니케이션 방법도 그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하지만 포르투갈보다 더 느슨하고 관대한 부분도 있다. 바로 회식 때의 술자리 문화다. 유럽에서는 동료들과, 혹은 비즈니스 관계에서 술자리를 가지더라도 취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큰 결례다. 그뿐만 아니라 취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직원에 대한 기본적인 자질을 의심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기업 홍보를 맡은 매니저인데, 저널리스트를 만나 술에 취했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프로페셔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질이 없는 홍보 매니저라고 때에 따라 회사에서 가차 없이 문책을 받고 내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얼큰하게 취해가며 동료애와 전우애(?)를 쌓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리고 회식에서 취했다고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사례를 개인적으로 본 적이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회식 때마다 얼굴이 벌게져 취했있었던 옆팀의 매니저님이 떠올랐다. 어쩜 그렇게 매번 취하시는지.. 그리고 평소엔 본인 부장님에게 꼼짝을 못 하다 회식 때 욕을 싸질렀던 사원 직원도 생각났다. 물론 다음날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를 대하며 일들을 했다. 부장도 한 번 즘은 아주 관대하게 (본인이 매번 종용한 술자리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넘어가준다.
그러면서 회식 때는 고기를 굽는 일이 많다며 자연스럽게 한국의 바베큐 문화, 술, 김치 등 음식 이야기로 넘어갔다. 사람들이 한국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음식 하나는 있었으면 바랬기에 김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풀어놓았다. 유네스코 무형 문화재에 선정된 김장 문화부터, 김치로 만들 수 있는 각가지 음식까지.. 포르투갈 사람들이 해외살이를 할 때 '코시도'를 그리워하듯 (리스보에따의 하루엔 느긋함이 있다 - 챕터 2에 나오는 이야기- 은근슬쩍 밀어 넣는 책 홍보), 한국 사람들에게 김치는 쏘울 푸드라는 이야기를 곁들였다.
포르투갈 직장 동료들은 너무나 고맙게도 15분의 발표가 끝날 때까지 집중을 하며 들어주었고(고맙게도 사장님이 발표할 때보다 더 집중해 줬다. 훗..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사장님 발표를 할 때는 서로 수다를 떨던 직원들이 똘망 똘망 나를 쳐다보며 경청해 주어서 힘이 되었다. 유일한 동양인 직원이 발표를 해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발표가 끝나자 배려심 많은 포르투갈 직원들은 많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약 백오십 명이 넘는 직원들이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기에 다른 부서 직원 분들과는 이야기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날 발표 후 여러 명의 직원들과 말을 할 기회가 생겼다.
브라질 출신의 한 동료는 본인이 직접 김치를 담가본 적이 있다고 경험을 공유해 나를 놀라게 했다. 37세의 인생 또한 김장은 막연하게 어려운 거라 생각하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가,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김장을 한 적이 있다. (유럽으로의 긴 배송기간 때문인지 쉬어서 물렁물렁해진 슈퍼에서 파는 김치에 질려, 직접 담가보았다.) 한국인인 나조차도 이제 겨우 한번 해본 김장인데, 브라질 사람이 김치를 담가봤다고 하니 나로서는 꽤 놀라웠다.
또 다른 포르투갈 동료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며, 왜 그런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한국 사람들과 포르투갈 사람들이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며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아 잘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명쾌한 답이 나오진 않는다. 갑자기 벤버지 감독이 떠오르는데, 두 나라 사람들 모두 예의가 바르다는 공통점과 또 가끔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어 그런 것일까?)
물론 모든 직원들이 내 발표 내용을 머릿속에 쏙쏙 입력한 것은 아니다. 회계팀 매니저는 나에게 발표가 너무 재밌었다며, 합장을 하며 내게 인사했다. '이런... 퀴즈까지 내며 설명을 했건만.. '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보는 성격은 못되어 그 자리에서 바로 정정해 주었다. '아니에요. 합장 말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매니저는 바로 자세를 고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가기 전, 내 보스의 보스 격이라 할 수 있는 매니징 디렉터인 바쉬코에게 인사를 건넸다. 바쉬코는 내 양볼에 베이지뇨를 하며, 동시에 사과를 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베이지뇨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에게 친근함을 표시하고, 예의를 갖추는 인사법이다. 그렇기에 그는 몸에 밴 포르투갈의 매너로 나에게 예의를 표현한 거고, 동시에 한국에서는 키스가 일상적이지 않은 인사법인 것을 알았기에 사과를 건넨 것이다. 그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답을 했다.
스스로를 관찰해 본 바를 말하자면, 누군가 나에게 베이지뇨로 인사를 건네면 나 또한 베이지뇨로 반갑게 화답한다. 친구들이나 직장동료가 내게 베이지뇨스라고 따뜻하게 말해주면 나 또한 베이지뇨스!!! 라며 작별인사를 한다. <수동적 베이지뇨스> 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내가 직장동료들에게 베이지뇨스를 충분히 하지 않아, 누군가가 오해를 해 섭섭함을 느꼈거나 나에게 거리감을 느꼈었더라면 (그러지 않았길 바라지만...) 오늘 다양성의 날에 이 오해가 풀렸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