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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Jan 16. 2019

미스터 그레이와 욕망의 커피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보면 레이첼이 에로 소설을 본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들키는 에피소드가 있다. 친구들은 알 듯 모를 듯 책의 내용을 인용하며 교묘하게 레이첼을 놀리는데 그중 로스는 센트럴퍼크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이렇게 말한다.



"어우, 커피가 다 식었잖아. 레이첼, 너의 뜨거운 욕망으로 이것 좀 데워줄래?"



그때는 나도 그 장면을 보고 웃었건만, 오늘의 나에게는 뜨거운 욕망으로 커피를 데워주는 사람이 있다. 전 세계의 여성들을 에로스의 세계로 끌어들인 섹시남, 미스터 그레이. 그래, 바로 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그레이 씨다. 전 회사에 다니던 시절,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사은품이었던 에스프레소잔을 우연한 기회에 얻었는데 이게 사은품 같지 않게 제법 우아하다. 검정색 바디에 적당한 무게감의 소서가 있고, 잔 안쪽에는 그 뜨거운 이름 'GREY'가, 소서에는 라운드를 따라 ‘Mr. Grey Will See You Now'라고 각인되어 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일아침 이 잔에 믹스커피를 타서 마신다(에스프레소잔에 믹스커피를 타면 물 양이 딱 맞는다). 그리고 커피가 줄어들며 'GREY' 각인이 나타날 때쯤, 시트콤 <프렌즈>를 떠올리며  ‘아, 그레이의 뜨거운 욕망이 이 커피를 데워주고 있구나’ 생각한다. 누구보다 핫한 아침이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나니 이게 살짝 문제가 된다. 회사에서는 나 혼자 이 잔을 사용하니 그런 뻘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고 말았는데 짐을 다 빼서 집으로 오니 집에 손님이 왔을 때도 습관적으로 여기에 커피를 내오게 된 것이다. 특히 우리 아버지에게 커피를 건넬 때면 ‘아, 그레이 씨는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하는 경박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 있는 손님맞이를 위해 소서까지 제대로 갖춘 잔을 따로 구매하는 것은 미니멀리스트로서 있을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그레이 씨의 뜨거운 욕망을 맛보고 돌아간다. 부디 그레이 씨가 사람 가리지 않고 노련한 솜씨로 적당한 온도를 만들어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아침 점심 하루 두 번 그레이 씨를 떠올리며 눈을 뜬다. 오늘도 상반신을 일으키자마자 미스터 그레이를 찾았다. 아침부터 이런 식으로 그레이 씨를 떠올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레이 씨의 영화는 별로 야하지 않았다. 차라리 레이첼의 더티북이 훨씬 야했을지도. 레이첼의 더티북이 데운 커피도 마셔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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