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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Dec 05. 2017

아침의 심볼

‘나만의 아침의 심볼’, 있으신지?


정말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느낌으로 첫 문장을 시작해보았다. 이런 식으로 시작한 이상, 하루키가 좋아하는 용두사미격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최근 해가 잘 드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했는데 그간 내가 살던 집들은 거의 북향이라 해와는 연이 없었다(반지하에서 약 1년간 산 적도 있는데 창문 앞이 바로 담벼락이었기 때문에 마치 지하처럼 빛이 한 톨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여름, 좀 더 넓고 밝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결심해 몇 군데를 둘러봤고, 정남향에 건조한 지금 집을 보자마자 한눈에 뿅 가서 바로 계약을 했다. 이 집에 이사 온 후로는 매일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뜨는데 ‘해가 있는 아침과 없는 아침이란 이렇게나 다른 것이구나’ 하고 새삼 놀란다. 이건 늘 미지근한 맥주만 마시던 사람이 우연히 차가운 맥주를 맛보았을 때 느낀 놀라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왜, 유에서만 무의 존재를 실감한다고 하지 않나. 아침 해를 보고서야 나는 그간 내가 아침 해를 보지 못하고 매일을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이 밝아지니 저절로 눈이 떠진다. 예전처럼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지 않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여유 있게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출근 시간도 빨라졌다. 몇 주간은 한 시간 정도 빨리 일어나 책을 읽고 출근했는데 오래가지는 못했다. 겨울에는 역시 아침 해고 뭐고 어쩔 수 없다. 아무튼, 독립한 지 13년. 아침이라는 것에 새로운 의미가 생겼다. 왜 텔레토비 동산의 해가 늘 웃고 있는지 알 것도 같다.



아침 해를 맞이할 때마다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2008년. 나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 전공이 일본어였던 탓에 읽고 쓸 줄은 알았는데 회화가 영 늘지 않아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일본에 간 것. 학교에 다닐 필요는 없었으니 도착하마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긴자 거리에 있는 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이었는데 나는 보통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했다.


아침 7시까지 출근해 약 30분간 지하와 1층, 2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가게 안을 정리한다. 오픈 시간은 정확히 7시 40분. 8시 30분까지는 꼼짝없이 바쁘다. 우리가 ‘피크’라 부르던 타임. 하지만 그렇게 손님들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면 그 이후에 오는 여유는 정말이지 달콤했다.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아침에 잠깐 바쁜 것쯤, 부딪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도 그랬다. 손님들이 한 차례 휩쓸고 간 어느 아침. 여름이 시작될락 말락 한 봄의 끝자락이었던 것 같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고 있었고, 가게 안에 햇볕이 쏟아졌다. 손님 손때가 잔뜩 묻은 낡아빠진 싸구려 프랜차이즈 커피숍이었는데도 봄날의 햇볕 덕에 가게 안이 필터를 먹인 사진마냥 화사해 보였다. 나를 포함하여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20대 초반의 여자 셋이 카운터에 서서 쏟아지는 햇볕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말했다.


“아침의 심볼은 뭘까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이국에서 아침 7시에 출근해 샌드위치와 커피를 만들다가 이런 질문을 받다니. 조금 감성적인 물음이라 누군가에게는 조금 부끄럽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그 물음은 내게 매우 중요한, 일생일대의 질문처럼 느껴졌다. 손님들이 우르르 몰렸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간신히 한산해진 봄의 아침. 가게 안에는 커피향이 가득하고, 카운터 너머에는 출근하지 않는 손님들이 신문이나 책을 읽으며 여유를 부린다. 이따금 손님이 오갈 때면 문틈 사이로 바깥의 활기찬 소리가 가게 안으로 한 토막씩 밀려들어왔고, 아침의 심볼을 물은 단발머리 아가씨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 햇볕이 닿아 솜털이 한 올 한 올 빛나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순간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느꼈다.


“닭 아니에요?”


막내의 발랄한 대답에 우리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닭 울음'이 아침의 심볼이지 '닭'이 어떻게 아침의 심볼이야. 하하하하.”
“이가라시 상 와세다 대학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서로를 놀리며 한참을 웃는데, 카운터에 기대 있던 단발의 여자아이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말했다.



“토스트네요.”
    


아.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아이의 말투와 표정 그리고 목소리마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토스트. 그 아이가 살포시 내놓은 그 단어에는 화사하고도 따뜻한 후광이 있었다. 그 순간부터 내게 ‘아침의 심볼’이란 ‘토스트’가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몇 주 전, <알쓸신잡>을 보는데 유시민 작가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생각나는대로 써서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난다).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집에 신문 냄새가 났어. 바깥 공기 때문에 차가워진 신문을 딱 손에 들면 잉크 냄새가 풍기는데, 그게 바로 아침의 냄새지.”


아, 유시민 작가에게 아침의 심볼이란 바로 신문이구나. 이것도 멋진 심볼이다. 나는 특별한 아침의 심볼을 품고 사는 사람으로서 미어캣처럼 고개를 세우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그 한마디 덕에 지금 이런 글까지 적게 되었다.
     


지금 나는 25년 된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층간소음도 엄청나고, 밤 12시까지 세탁기를 돌려대는 위층 때문에 몇 번이나 우퍼를 살까 말까 고민 중이지만 그래도 아침이 되면 ‘아, 그래도 제법 괜찮은 집이야’ 하는 생각이 어김없이 든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끄트머리에는 토스트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침에 토스트를 해 먹을 정도로 부지런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남다른 아침의 심볼을 가진 것은 실제 토스트를 해 먹은 것에 버금가는 에너지를 매일 아침 준다. 오늘도 나는 먹지도 않은 아침의 심볼을 떠올리며 씩씩하게 출근을 한다. 이번 주말에는 커튼을 열자마자 꼭 토스트를 먹어야지.

그래. 결국 용두사미식 결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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