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 모교에 가서 발표할 직업 특강 스크립트를 준비하던 중에 ‘왜 대학에 가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조금 길게 설명하고자 적은 글입니다. 수험생 여러분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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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수능은 잘 보셨나요? 잘 보신 분들도 있고,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해서 아쉬운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험을 잘 봤든 못 봤든, 저는 지금 여러분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굴러다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죠?
‘대학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야.’
저도 수험생 때 수능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경우는 여러분보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 같아요. 점수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저보다 두 살 많은 저희 언니는 1학기 수시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거든요. 그에 비해 수시는 다 떨어지고 수능이라는 최종 지점까지 마라톤을 해온 저는 가슴 한구석에 늘 언니에 대한 열등감을 품고 살았지요. 그런데 수능 성적마저 그저 그랬으니, 정말 매일이 괴로웠습니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대학, 좋은 과에 들어가 무사히 졸업을 하고 지금 8년차 에디터가 되었지만 그때는 정말 괴로웠어요. 언니가 지나가는 말로 제게 “대학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곳이야”라고 말했는데, 당연히 그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도 몰랐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가까이 지난 이 시점에서야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교의 일본어과에 입학했습니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 저희 학교 영어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지요.
“쪼야. 막상 입학을 하면 외고를 나온 애들도 있고 외국에서 살다 온 애들도 많아서 너는 그 아이들과 스타트 지점이 다를 거야. 그러니 지금 열심히 공부해둬야 해.”
저는 그 말을 들었을까요? 천만에요. 공부라면 수험기간 내내 지긋지긋했는데 대학 입학 전 그 꿀 같은 시기에 자발적으로 공부할 리가 있나요.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생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 입학한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고, 외고 친구들은 물론 영어·중국어·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친구들, 여기에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잘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저는 일반 고등학교에서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막 떼고 온 사람인데 스타트 라인이 달라도 너무 달랐죠.
그렇게 한참 뒤처진 지점에서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저는 결과적으로 그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제 인생의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언어 고자였어요. 초등학교 때는 윤선생영어교실 덕에 수재 소리 좀 들었지만 학교에서 2형식을 배운 시점부터 모든 것을 포기했거든요. 일본어도 띄엄띄엄 익히기는 했지만 언어적 센스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언어를 배우고 해외에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집단에 속하다 보니 내가 들인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 정도는 얻게 되었습니다. 집이 너무 좋아서 모든 수업을 1234에 몰아넣었던 제가 학과 분위기에 휩쓸려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고, 언어 자격증도 땄죠.
그저 점수에 맞춰서 적당히 선택한 대학, 적당히 선택한 과에 들어갔을 뿐인데, 저는 지금 책을 만드는 8년차 에디터가 되었습니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에디터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에디터가 되기로 결심한 부분은 차차 설명하지요). 그런데 유학을 다녀온 경험이나 일본어를 읽고 쓰는 능력은 출판사에 입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일서를 검토하고, 필요하면 번역도 합니다. 학생 때 책으로만 만났던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책을 편집하고 그분이 내한했을 때는 2박 3일 동안 통역도 맡았지요. 책이나 SNS상으로만 구독하던 유명 작가분들과 가끔 안부도 주고받게 되었고, 기분 좋은 날에는 함께 술도 마십니다. 그리고 서로가 한 말과 쓴 글을 보며 농담을 주고받지요. 지금 제 주변에는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제 삶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라면 대학에 원서를 쓴 시점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듯 대학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만 내가 어느 집단에 속하느냐는 인생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같은 목표를 지닌 집단에 속하게 된다면 내가 어느 순간 의욕을 잃고 노 젓기를 멈추더라도 내 주변인들은 목표를 잊지 않고 여전히 으쌰으쌰 노를 젓고 있을 테니 나는 잠시 쉬었다가 숨을 고르고 그들이 나아간 방향으로 다시 힘차게 노를 저으면 됩니다. 설사 내가 영혼 없이 노를 젓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곳은 얼마 전까지 내가 목표로 했던 곳이었고, 중간에 내 마음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곳에 한번 닿아본 것과 아닌 것은 결과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반대 상황도 가정해봅시다. 멋도 모르고 한 집단에 들어가 분위기에 휩쓸려 알지도 못하는 곳까지 열심히 노를 젓게 되었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손해는 아닐 겁니다(정말 위험하고 이상한 곳이라면 당연히 당장 뛰쳐나와야겠지요). 어쨌든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당신은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그 노력은 당신의 폐활량이나 근육이 되어 앞으로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도록 자양분이 되어줄 테니까요(저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다소 무난한 과에 입학했기 때문에 저의 경우 운이 더 좋았지만요). 하지만 되도록 그간의 노력을 100퍼센트 활용할 수 있는,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지거나 생각지도 나의 능력을 끌어올려줄 집단에 속해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점수가 잘 나와 들떠 있는 분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학교, 좋아하는 과에 부디 잘 입학하시기 바랍니다. 단, 내가 선택한 집단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을지를 상상해보세요. 나는 사람들과 어떤 정보를 공유하고 싶고, 그들과 내가 만나 어떤 시너지를 이룰 수 있을지를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안타깝게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신 분들은, 만약 앞으로 어떤 전형이 남아 있다면 그것에 최선을 다하시고, 좋든 나쁘든 결과가 나오면 그 안에서 또 나를 한 단계 끌어올려줄 집단을 찾으시면 됩니다.
대학은 절대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만 내가 속한 집단은 어떠한 형태로든 나를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지금의 힘든 과정을 부디 즐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