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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Dec 09. 2017

소파에 앉아 영화나 한 편 볼래요?

자취를 시작한 지 13년이 되었다. 10년도, 15년도, 20년도 아닌 때에 문득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좀 우습지만 13이라는 숫자와 2017년은 나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왜냐고? 올해 비로소 내 소파가 생겼으니까! 어디에서 들어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파에 앉아 영화나 한 편 볼래요?”라는 대사를 나도 이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유혹적인 말인가! 소파 하나로 굉장히 섹시한 여성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우하하하.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자취인에게 의자와 소파는 특별하다. 여기서 말하는 ‘특별함’이란 ‘아주아주 중요하다’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돈을 들이기에 애매하다’라는 뜻이다. 돈을 들이기에 애매한 것에 ‘특별하다’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돈을 들이기에 애매한 물건을 산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의 경제적 여유를 탑재했다는 뜻이 아닌가?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내가 무슨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된 것 같은데 사실 나에게는 아직 소파를 살 만한 여유가 없다. 이번 주 우리 집에 왕림하실 소파님은 대학 선배인 H 언니가 일본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내게 주는 것이다.
 


물론 소파를 사려고 돈을 모으던 시절도 있었다. 한 달에 5만 원인가, 통장까지 따로 만들어 차곡차곡 모았다. 하지만 몇 개월 뒤, 목표한 돈은 모았지만 소파는 결국 못 샀다. 그렇게 푼푼이 모은 돈일수록 지난날의 고생이 떠올라 더 못 쓰겠더라. 그럼 그때 모은 돈은 어떻게 됐느냐고? 옷과 김밥, 신발 등으로 점점이 흩어진 지 오래다. 남은 것이라고는 ‘어떤 물건을 사려면 충동구매가 최고’라는 교훈뿐. 물론 지금은 그 교훈을 행동으로 충실히 옮기는 중이다.
 


스무 살,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요노스케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달랑 이불 한 채만 들고 서울에 왔다. 가구가 거의 다 붙어 있는 풀옵션 원룸이었으니까. 그곳에서 언니와 약 4년 정도 살다가 이듬해, 다섯 살 터울인 막내가 서울로 올라오며 우리는 방 세 개짜리 집으로 이사 갔다. 도배와 장판을 하느라 돈을 탈탈 털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침대 아니면 바닥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특별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단출한 집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20년 넘게 언니와 방을 같이 쓰다가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되었는데 그깟 의자가 대수인가.
 


그리고 스물여덟 살의 여름, 취업한 지 3년 되던 해에 드디어 제대로 된 컴퓨터용 의자를 하나 구입했다. 3년이나 일했고 돈도 어느 정도 모았으니 딱히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될 곳에 한번 써보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역시 어떤 물건을 사려면 충동구매가 최고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위메프였던가 어딘가 소셜커머스에서 5만 얼마를 주고 샀다. 의자치고는 현저하게 싼 가격이지만 서랍장보다, 침대보다 비싼 의자를 사는 것은 자취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일! 가장 무난한 검은색을 고른 탓에 기분에 따라 조금 칙칙해 보이기도 하고, 돈을 쓰고 싶어 눈이 뒤집힌 순간에조차 내 사정에 맞는 가격의 물건을 고른 탓에 무난하다는 것 외에 어떤 장점도 찾아볼 수 없는 의자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에 앉을 때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 꼭 필요해서 산 물건은 아니지만 내 삶의 질을 끌어올려줄, 내 돈을 주고 산 첫 번째 사치품이니까.
 


그리고 내 기준에서의 사치품이 점점 늘어나게 된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닫게 되었다. 삶의 질이란 이렇게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것들에 얼마나 돈을 쓰느냐로 좌우된다는 것을.



예쁜 그릇에 밥을 먹는 것,

집 안 곳곳에 식물을 두는 것,

형광등 대신 조명등을 켜는 것,
이불커버와 베갯잇의 색깔을 맞추는 것,

조금 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하는 것,

잠자리에 들기 전 소파에서 잠시 나른함을 예열하는 것
그리고 “소파에 앉아 영화나 한 편 볼래요?”라는 대사도 이에 해당하지.



필수품도 아닌 것들이 이렇게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참 허탈하면서도 불공평한 일이다. 하지만 멋과 상관없이 꼭 필요한 것들만 구비되어 있는 회사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와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였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들이 퇴근 후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기분을 좌우한다. 젠장,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이제 토요일이면 소파님은 미세먼지를 뚫고 허름한 우리 집에 오겠지. 남색 스트라이프 커버를 유유히 뽐내며 말이다. 침대까지 내다 버리고 소파 자리를 확보한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틀린 선택인들 뭐 어떤가. 내게 소파란 이 돈을 주고 꼭 사느냐 마느냐를 몇 달 동안 고민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침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사치품인데. 비록 자본주의의 찝찝한 허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토해내는 중이지만 말이다.



물론 내 소파는 영화를 볼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겠지만 “영화나 한 편”을 뺀 “소파에 앉아볼래요?”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소파를 제공해주신 H 언니에게 무한 영광을 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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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에 작성한 글입니다. 지금 저는 다른 집으로 이사했고, 저 소파는 다행히 영화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안착해 있습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집이지만 앞으로도 이 상태일 것 같아 급 소파에게 미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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