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졸쪼 Mar 01. 2018

성추행의 기억은 어디까지 1

이제부터 내가 3n년간 당하거나 목격한 성추행의 기억을 더듬어보려 한다.



1. 최초의 성추행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1, 2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쉬는 시간에 학교 화장실에 갔는데 양쪽 벽 너머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쳐다보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이미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보던 중이어서 몸을 가릴 수가 없었다. 벽 너머에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은경이야.”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울면 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교실로 돌아가 담임선생님에게 이 상황을 이야기했다. 남자아이들이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내가 볼일 보는 모습을 훔쳐봤다고. 책상에서 뭔가를 적고 있던 할머니 담임선생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래서 어쩌라고?” 하고 얘기했다. 수업 종이 울렸고 선생님은 나를 자리에 돌아가게 한 뒤 수업을 시작했다. 그 후로 한동안 학교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꾹 참았다가 집에서만 갔다. 집 앞에서 소변을 지린 적도 있지만 학교에서는 절대 가지 않았다.


기껏 여덟아홉 살밖에 먹지 않은 아이들이 어디에서 그런 범죄 수업을 배웠을까. 어딘가에서 그런 것을 배우지 않았다면 정말 타고난 범죄자 혹은 악마가 아닌가.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할.



2. 아이스케키 같은 건 당하지 않았다. 아예 치마 자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내 주변 친구들이 숱하게 당하는 꼴을 봤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이스케키란 치마를 훌렁 들추고 도망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여자아이가 서 있으면 법의 보호를 받는 이 성범죄자들은 기척 없이 뒤에 다가와 피해자의 치마를 어깨까지 들어올렸다. 치마가 팽팽하지 않을 정도로만 들어올리고 여자아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여 피해자가 범죄를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반 아이들이 모두 속옷만 걸친 채 움직이는 여자아이의 엉덩이를 봤다. 여자아이가 눈치 채고 울음을 터뜨리면 남자아이들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역겨운 장면이었다. 저학년 때는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여자아이들의 엉덩이를 봤다.



3. 고학년이 되어 가슴이 부풀자 남자아이들은 내 친구들의 가슴을 만지고 도망쳤다(나는 발육이 늦은 편이어서 그들의 레이더망에는 걸리지 않았다). 10분이라는 쉬는 시간 동안 20명이 넘는 남자아이들이 실내화를 쿵쾅거리며 여자아이들의 가슴을 더듬으러 다녔다. 이 아이의 가슴을 만지고 도망쳐서는 가까이에 있는 다른 여자아이의 가슴을 더듬었다. 선생님이 나간 게 확인되는 순간부터 선생님이 들어오기 직전까지, 다분히 계획적이고 악질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10분 뒤, 수업 종이 치면 남녀 아이들은 서로의 짝이 되어 수업을 들었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선생님의 명령이 없으면 따로 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여자아이들이 울면 선생님들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수업에 방해된다며 다그쳤다. 나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지만 나도 언젠가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다. 마치 왕따처럼. 나는 지금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에 반대하고, 같은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



4.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가족들과 야외 수영장에 갔다. 튜브를 끼고 한창 헤엄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성기를 손으로 훑고 지나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 기억하는 건 어린아이는 아니었다는 것. 손가락이 길었다. 그리고 매우 계획적으로 물속에서 잠영하며 지나쳐갔다는 것.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끔찍한 기억. 그것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을 인지한 후로는 수영장에 절대 안 간다. 누군가가 날 만져도 잡을 수 없는 장소, 그 전제만으로도 피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5. 또 수영장에서의 기억. 학교에서 수영장으로 소풍을 갔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또 남자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여자 탈의실? 아니, 그곳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안전한 곳이란 없었다.



6. 초등학교 4학년 때. 집에 친척분이 놀러 왔다. 평소 목소리도 크고 이래라저래라 사람을 너무 하대하는 것 같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분은 어찌된 영문인지 날 예뻐했다. 인사만 하고 사촌들과 놀러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내게 얼굴을 들이대더니 뽀뽀를 요구했다. 부모님에게도 뽀뽀한 지 오래된 나이였고, 그 사람하고는 정말 하기 싫었다.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니 그는 나를 눕히고는 내 양 손목을 결박한 뒤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문질렀다. 어떤 남자와 첫 키스를 할지 기대하던 열한 살 여자아이에게 끼얹은 구정물. 문을 잠그고 방 안에 들어가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려봤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아이이니 이런 건 키스가 아니라고.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가 사촌들과 재밌게 놀았다. 그렇게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어른들 중 내 양손을 억압하며 다가온 그 미친놈을 막아준 사람은 없었다. 문제 삼아봤자 좋을 게 없었다.


    

7. 중학교 2학년. 하교 후 치과에 갔다. 단순 충치였는데 진료대에 누워 있으니 의사가 내 입안을 살펴보고 치아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내 가슴골을 만지면서. 당시 나는 가슴이 갓 부풀기 시작한 아이였고, 당시 우리의 교복은 너무나 크게 제작되었기 때문에 앞에서 언뜻 보면 내 가슴이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키는 150센티도 되지 않았다. 교복을 입지 않았다면 남자아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의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집요하게 계속 내 가슴골을 더듬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 간호사들을 보았지만 그녀들은 침묵했다. 내가 당하는 게 그게 맞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중요한 순간은 끝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현행범이 아니게 되고 증거가 사라져 뭐라 문제 삼기가 어려워졌다. 주변 사람들이 침묵하면 더더욱. 치료는 대강 마무리되었고, 나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치료비까지 내고 왔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내가 미친 것 같지만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치료비를 내지 않으면 경찰서에 가는 것은 나였다. 현장에서 침묵했던 간호사들이 경찰이 왔다고 해서 내 편을 들어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며칠 뒤, 그 병원에 한 번 더 갈 일이 생겼다. 도저히 혼자 갈 수가 없었다. 반 친구에게 그 병원에 좀 같이 가달라고 하니 친구는 그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의사 너무 만져.”


그럼 그렇지. 나만 만졌을 리가 없었다.





여기까지가 열다섯 살 때까지 당한 일들이다. 이렇게 적어보니 정신과 치료 한 번 없이 멀쩡한 사고회로를 가지고 살아 있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갑자기 피곤해져서 열다섯 살 이후는 다음에.



매거진의 이전글 신년 목표는 '죄책감 없는 시간 낭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