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지구과학 시간의 일이다. 수업 중에 누군가가 왜 이 과목 교사가 되었는지를 선생님에게 물었다. 우리의 귀요미였던 P 선생님은 자신의 매력 포인트인 볼살을 한껏 밀어 올리며 설레는 표정으로 답을 해줬는데 아이고 선생님, 안타깝게도 그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납니다. 대신 그 답에 곁들여 해준 이야기만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이 남았다.
대학 신입생 시절, P 선생님이 전공 수업에 들어갔단다. 첫 수업이라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왜 이 전공을 선택했는지를 물었는데 다들 이 학문에 대한 열망 어쩌고 하며 허세를 가득 담아 대답했다. 그리고 한 여학우 차례가 돌아왔는데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고등학교 때 지구과학 선생님이 수업 시작할 때 늘 칠판에 지구를 그렸는데, 그 원이 엄청 동그랗고 예뻐서.”
더 멋있는 이유를 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더라며, 그런데 그 대답이 정말 귀여웠다고 웃는데 그 표정이 마치 신입생 시절의 P 선생님을 보는 것 같아서 내가 다 설렜던 기억이 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이따금 전후 사정도 없이 내 머릿속을 점령하곤 했다. 그리고 요즘 시간이 좀 남기에 그 이야기가 왜 이토록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가에 대해 곰곰 생각해봤다.
별것 아닌 이유로 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 분명 그 대답 이면에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나 의지가 숨어 있을 테고, 표면적으로 슬쩍 흘려보낸 별것 아닌 이유는 그 확신에서 흘러나온 ‘여유’였겠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티가 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일 것이리라.
P 선생님은 당시 그 여학우의 대답을 두고 ‘귀엽다’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아마 ‘멋있다’라는 단어를 미처 떠올리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니 십수 년이 지나서도 그 대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던 거겠지.
강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여유로운 사람이라. 먼 훗날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준다면 저런 이미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떠올릴 때마다 볼을 볼록하게 부풀리고,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그 순간을 기대하며 지금 힘을 내야지. 뜻하지 않게 이공계 남학우의 가슴에 오래오래 남아버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이과 흥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