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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Mar 29. 2018

당신, 사생활이 엉망진창인가

얼마 전 자소서를 하나 썼다. 이것저것 새로 써야 할 문서들이 좀 있었는데 그래, 뭐 이 정도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정리해 냈다. 매일 글 읽고 쓰는 게 일이었던 터라 자소서 따위는 이제 휴지에 코 풀 듯 순식간에 생산할 수 있었는데 악! 메일을 발송하고 보니 경력 사항의 날짜를 틀렸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으로 틀렸다. 이 미친, 무슨 자격증 따는 데 3년이나 걸렸엌ㅋㅋ 왜 진작 못 봤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 제발 인사 담당자가 눈치채지 못하기만 바랄 뿐이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결코 이러지 않았다. 출근하러 집을 나선 시점에서부터 무슨 업무들을 어떤 순서로 할지 머릿속에서 리스트를 만들고 퇴근 전에는 반드시 클리어했다. 책상은 퇴사하는 사람처럼 깔끔, 문서는 오타 하나 없이 정확하게, 9년간 지각은 5회 미만. 행동이야 가끔 띨했지만 내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절대 띨하지 않았다.



“대리님은 집도 알콜로 닦을 것 같아요.”



한번은 이런 소리도 들었는데 천만에요. 사생활은 정말 엉망진창입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린 과일을 믹서에 갈아 마신다. 과일 껍질을 벗기기도 귀찮고, 요리는 더 귀찮……. 그리고 미친 사이클로 맥주를 마시며 예능과 영화를 뇌 속에 눌러 담는다. 취침 시간까지 약 네 시간! 지금 당장 흥을 끌어올려주겠어!



방금 본 영화와 예능이 재미없으면 만족스러운 느낌이 올 때까지 뭔가를 계속 본다. 음료 위주로 식사를 하기 때문에 싱크대에는 컵이 쌓여 있지만 웬만해서는 치우지 않는다. 당연히 빨래와 청소도 주말에. 목표는 오직 하나. 지금! 당장! 즐거워야 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면, 회사 생활에 치여 수년간 사생활을 엉망진창으로 방관한 덕에 지금도 그 퀄리티가 회복이 안 된다. 자소서는 누가 봐도 명실상부 지금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회사나 저자를 대변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보니 도저히 긴장이 안 된다. 말도 안 되죠? 저도 예상치 못한 결과입니다.



회사에 다닐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일과 나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은 일일 뿐 절대 나 자신이 될 수 없다고. 그래야 그 일의 어딘가가 잘못돼도 멘탈을 지킬 수 있고, 멘붕에서 오는 2차 실수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퇴사하는 순간까지 그 작업에 실패했다. 오타를 줄인답시고 종이가 너무 하얘서 글자가 안 보일 때까지 집착하고 또 집착했다. 결론은? 일은 더 괴로워졌고 본질적인 나 자신과의 동기화에는 실패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게 번아웃이 아니라는 것. 사생활이 엉망진창이란 것은 이미 너무 일에 치우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님들도 분명히 자소서 치명적으로 틀릴 거예요. 우리의 인사 담당자가 꼼꼼하지 않길 바랍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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