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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Sep 03. 2018

삶의 지름을 넓힌다는 것


프로들만 사용한다는, 그래서 가격도 프로들의 수입에 맞추었다는 그 사악한 패드를 샀다. 실은 맥북을 살까 아이맥을 살까 아이패드 프로를 살까 고민했는데 문득 나란 인간은 언젠가 저 시리즈를 다 살 것이고 기타 액세서리까지 다 가지려면 약 1,000만 원은 필요하다는 계산에 이르자 도대체 내가 저것들을 가지고 앞으로 뭘 해 먹고살 생각인지 타자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김 대리, 이 청구서가 말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며칠 전, 이렇게 고민만 하다가는 정말 일 내겠다 싶어 그냥 매장을 방문해서 직관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사버리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모 작가님을 불러내 프리스비 매장에 갔는데 직원의 마법사 같은 언변에 200만 원으로 잡았던 예산이 갑자기 300만 원까지 치솟았……. 겉은 허세로 둘둘 감겨 있지만 다행히 뼛속은 소시민이었던지라 카드를 단단히 부여잡고 근처 커피숍으로 작전상 후퇴,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아주아주 얕은 현타를 겪었다.



나는 왜 쿨하게 300만 원을 긁을 수 없는 인간인가. 1억도 1,000만 원도 아니고 300도 못 긁는 현재를 만든 건 바로 누구인가! 그러다가 이런 생산적이지 않은 자아자판이 무슨 득인가 싶어 옆에 있는 모 작가님의 중개로 아이패드 프로를 대단한 가격에 즉석에서 쿨거래해버렸다. 그래, 인생은 이렇게 늘 홧김에 결정되곤 하지.



솔직히 구입 후 하루 정도는 후회했다. 나는 이 물건으로 강의 시 자료 화면을 보여주거나 밖에서 문서 작업을 하고 가끔 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이 기기는 문서 작업이나 PT용 보조 도구로 사용하기에는 전혀 적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내 그림이 낙서 수준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인간의 부족한 기술을 기계가 커버해주리라는 생각부터가 멍청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 뼛속에서 쉬고 있던 나의 소시민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물건을 가졌는데 처박아놓고 안 쓴다는 게 말이나 되나! 우리 소시민들은 손에 넣은 물건이라면 그게 뭐든 1200퍼센트 활용해야 하는 법! 그리하여 스케치도 해봤다가 채색도 해봤다가 필기도 해봤다가 앱도 결제해보는 등 온종일 아이패드를 손바닥에 붙이고 있으니 어라…… 그림 실력이 늘었다. 게다가 지금 실력으로 잘 그릴 수 있는 그림체를 찾다 보니 나는 스포츠 선수들의 역동적인 모션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거기에 한두 줄 덧붙이다 보니 앞으로 시리즈로 그릴 만한 콘셉트가 떠오르고, 이걸 나중에 독립 출판으로 내볼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모든 게 프로들의 패드를 사고 3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소시민 만세!



좋은 물건은 삶의 지름을 넓혀준다. 책을 더 많이 읽으라고 매일 밤 나를 유혹하는 소파,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작가 모드로 바꿔주는 고요한 무드의 스탠드, 어리바리한 에디터로서의 이미지를 날카롭게 포장해준 좋은 디자인의 안경, 불안함에 펄떡거리는 가슴을 단박에 잠재워주는 식물들, 그리고 그림이라는 곁가지를 뻗게 해준 이번 아이패드까지. 덕분에 나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서는 글을 쓰고 저녁에는 계속 그림을 그린다. 글과 그림, 좋아하는 일을 하루의 시작과 끝에 배치하니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든 하루를 망치기란 불가능해졌다.



덧붙여 이대로 그려나가다 보면 언젠가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도 있다. 에디터에서 작가도 되었는데 일러스트레이터가 못 될 것은 뭔가(아이패드 브라보!). 사실 이 글도 곁들일 일러스트를 그리려고 써보았다. 그림을 그리려고 글을 쓰다니,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말도 안 되는 구조가 눈에 보인다. 그래도 일단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자, 100만 원짜리를 해결했으니 이제 900만 원 남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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